1. ■ 채호기 5년 만에 새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출간

    언어의 물질적 상상력 펼치며 언어의 은유적 활동 철저 제한

    "시인은 언어의 정자 수정 받아 꽃을 잉태하는 관능적 신부"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글자들에는 손이 닿으면 / 움츠리는 더듬이가 있다. / 손은 포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닿기 위해서, 만지기 위해서 움직인다. // 글자의 더듬이는 손이 만지는 / 것을 거부한다. 글자는 촉수를 / 뻗어 눈동자를 어루만진다.'('애무의 행로' 부분)



    '몸'과 '수련'의 시인 채호기(57)가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등에 이어 5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문학과지성사 발행)을 최근 펴냈다.



    네 번째 시집 <수련>을 분기점으로 언어 탐구를 본격화한 시인은 전작 <손가락이 뜨겁다>에서 언어의 형이상학적 탐색을 심화한 데 이어 이번엔 언어를 둘러싼 물질적 상상력을 펼쳐 보였다. 언어와 세계 사이에서 끊임 없이 갈등하고 고민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을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 듯하다.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에서 화자인 '그녀'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그'와 매일 밤 악몽 같은 레슬링을 하며 사지가 졸린다. 시인이 글자와 씨름하듯, 그녀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몸과 숙명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한다. "시인은 언어의 정자를 수정받아 꽃을 잉태하는 관능적인 신부"라고 규정하는 채호기는 이렇게 형이상학적 관능의 언어로 시를 써내려 가지만 감각적인 체험보다는 지적인 인식에 기초한다.



    시집의 해설을 쓴 박상수 시인 겸 문학평론가는 "채호기는 활자가 뻗어나가는 다른 경로를 다 틀어막고 오직 그것을 '나-언어'로 제한한 뒤에 활자 그 자체를 평면물질로 다룬다"며 "나와 언어의 직접 대면만을 허용하고, 언어가 다시 대상으로, 그리고 세계로 전화되는 과정은 매우 철저하게 제한한다"고 분석했다. '까끌까끌한 글자들, 바라보면 글자들은 / 눈을 통과해 스며들지 않고 / 눈 속에 쌓이고 쌓여 팽창한다.'로 끝나는 '팽창'이 대표적인 예다.



    그의 분석처럼 '타임머신'에서 화자는 자신을 찾는 여인의 전화를 받지만 '기억을 더듬고 현실을 들춰도 / 그 여인이 찾는 건 내가 아니다.'면서 '아니에요. / 당신이 찾는 그는 / 책 속에 있어요.' '당신이 그를 만난 건 책 속 어떤 페이지에 있는 한 문장에서일 겁니다.'라고 말한다.



    채호기의 시에서 '언어-대상-세계'의 연결은 끊겨 있다. 박상수 시인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은유적 방법론에 의해 가동되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언어활동의 기계적 골조를 들여다 보게 되고 이에 심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고 했다.



    언어의 은유적 활동을 제한하고 성찰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뒤 시인은 마지막 시 '얼음'에서 언어는 곧 침묵이고 침묵은 곧 거대한 빙산이라고 적었다. '얼음은 침묵이다. / 침묵은 입 다문 영혼, / …… / 언어는 소리도 글자도 아니며 / 우리가 상상하는 부재하는 사물도 아니며 / 우리가 생각하는 뜻도 아닌 것. / 언어는 침묵이다. / …… / 침묵이 언어와 조우하는 불가능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면 / 어쩌면 침묵은 이 거대한 빙산이다. / 빙산은 언어가 없는 세계-이 빙산이 곧 언어 자체이기 때문이다. / 침묵을 목격할 수 없는 이유는 / 언어가 옮기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2. 입력시간 : 2014-02-26 09: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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