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287)] ‘몽로’ ‘ 광화문 국밥’ 박찬일 조리사
  • | 2017-08-05 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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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경계 넘어 대중이 찾는 ‘박찬일식 음식과 음식점’성공 신화 쌓아

이탈리아로 ‘국수 공부’ 유학…귀국 후 신선한 시도로 ‘성공’ 이어가

자칭 ‘B급 조리사’, 실력ㆍ명성은 ‘A급’…대중성, 창조성 갖춘 음식 내놔

박찬일 조리사와 필자는 선후배 사이다. 잡지기자 선후배 사이다. 지금도 그는 필자를 ‘선배’라고 부른다. 짧은 인연. 같은 공간이었지만 부서는 달랐다. 한두 해나 되었는가 싶었는데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불쑥, 박 조리사는 유럽으로 ‘국수 공부’하러 떠났다. “국수를 배우러 유럽에 간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왜 하필 유럽까지 가서 국수공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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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 그해였다고 했다. 박찬일 조리사. 본인이 ‘셰프’라고 불리는 것보다 조리사, 요리사가 편하다고 하니 본인의 뜻에 따라 ‘조리사’라고 표기한다.

1998년 그는 유럽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동료,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해 못할 일이었다. IMF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다. 뒤숭숭한 정도가 아니었다. 혼란, 상전벽해라는 표현도 사치스러웠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맨붕’ 상태였다.

“IMF를 겪으며 ‘회사가 직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개인을 보호한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깨진 거죠. 급료가 깎이니 살기도 어렵고, 애당초 기자직에 큰 미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인터뷰 섭외하고 글 쓰는 것도 힘들었고요. 그만둘 핑계거리가 많았던 거죠.”

급료는 50%가 깎였다. 그가 다니던 직장의 ‘봉급 삭감’이 유독 더 심했다. 50%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결혼했고 아이도 있었다. 가장이다. 호구지책이 필요하다. 느닷없는 ‘유럽으로의 국수공부 행’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앞선다.

박찬일 조리사는 서울 구로동 출생이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1남3녀. 누이가 많은 집안이다. 남자 형제가 없으니 성장과정에 아무래도 여성적인 요소들이 많이 배어든다. 바로 위의 ‘작은 누나’는 3살 터울. 누나가 연합고사를 볼 때 사용한 수험서가 있었다. 이리저리 뒤적여 봤다. ‘가사 과목’ 책들이 재미있었다. 옷, 요리, 육아, 주생활, 식생활에 관한 교과서와 참고서였다. 음식에 대한 내용들, 몇 첩이니, 반상 같은 용어들은 지금도 생각난다. 샌드위치 만드는 법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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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분위기도 그랬다. 예전 잡지 기사들의 내용은 크게 두 파트다. ‘인물’과 ‘생활’이다. ‘인물’ 파트에서 일했지만 사무실 한쪽은 전부 ‘생활’을 다루는 공간이다. 패션, 육아, 인테리어, 음식 기사를 생산한다. 제법 눈동냥도 된다. 그 공간에서 늘 생활기자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 누나의 책, 참고서 등으로 익힌(?) 관심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

국수에 대한 열망? 호구지책과 호기심?

왜 하필 국수 공부인가?

“호구지책으로 정한 거죠. 국수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습니다. 음식 만지는 일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았고. 음식 공부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항감이 없었어요. 아내한테 허락을 받는 일만 남았죠. 국내에 짜장면이나 잔치국수, 우동 같은 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남은 게 유럽,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국수였죠. 이른바 파스타라고 하는 것들. 그걸 배우자고 결심했습니다. 저희 세대는 식당에서 일하면 굶지는 않는다는 걸 듣고 자랐습니다. 식당 하면 굶지는 않겠다, 그러면 뭘 할 거냐, 국수다. 이렇게 된 거지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술술 풀어놓는다. 전세보증금 1700만원. 가족은 처가에 보내고 전세보증금을 유학자금 삼았다. 6개월 예정. 2년을 넘겼다. 유학 기간이 길어지니 공부를 하는 중에 돈이 다 떨어졌다. 유학 중, 두 번이나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공부는 더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두 번이나 되돌아 와서 일을 하고, 얼마쯤 돈이 모이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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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웠지요. 토마토 파스타나 고기가 들어간 스파게티, 뭐, 이런 걸 배우고 싶었는데 그건 안 가르쳐 주고, 엉뚱한 음식들만 가르쳐 주니까요.”

한식을 배우러 외국인이 한국을 찾았다고 가정하자. 그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김치 담그는 법이나 된장찌개 끓이는 법, 잔치국수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지는 않을 터다. 마찬가지.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탈리아 음식, 국수를 배우러 온 외국 학생’에게 자기네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가르칠 일은 없다.

다행히 좋은 선생을 만났다. 피에트로 발디.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 봄에 귀국했다.

“나는 B급 요리사다”

어렵게 공부하고 귀국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30대 후반의 나이. 취직부터 힘들었다. 어차피 주방 일은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흔을 바라보는 주방의 막내를 원하는 식당은 드물다. 귀국 후, 월급은 백만 원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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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얼치기’라고 생각한다. 기자 노릇도 싫었다. 사람 만나는 것 힘들고, 인터뷰, 기사 작성도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동료, 선후배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동료, 선후배들이 대신 해내고 있었다. 죄스러웠다. 기자 노릇을 그만 둔 가장 큰 이유다. 기자로서 ‘B급’이었다고 고백한다.

‘글 쓰는 셰프’로 이름을 얻었지만 글쓰기도 ‘주류, A급’은 아니었다. 시, 소설로 등단한 것도 아니다. 하찮은 잡문만 써댔다. 글로 밥 먹고 사는 일은 포기했다. 글 쓰는 일도 ‘B급’이었다고 자책한다.

음식 만드는 일도 그러했다. 청담동 등 강남에서 일했지만 ‘주류에 속하는 A급 조리사’는 아니라고 표현한다. 늦은 나이에 주방 일을 시작했다. 서글픈 출발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경력이 짧다. 낯가림도 심하다. 스스로 소심하다고 말한다. 쉬 사람을 사귀지 못한다. 유명한 사람, 돈 있는 이들,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하지도 못한다.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일은 아무래도 서투르다. 자신을 ‘B급 조리사’라고 낮추는 이유다.

대중적인 음식, 음식점을 기획하고 싶다

‘일 피오레’ ‘뚜또베네’ ‘라꼼마’ ‘몽로’ ‘광화문국밥’

주방 일 초기, ‘뚜또베네’를 기획할 때 그는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를 전면에 내세웠다. 묵호 문어, 진도 보리 싹, 00산 고등어…. 음식에 생산지, 원산지를 표기했다. 신선한 시도였다. ‘00산 고등어로 만든 파스타’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가게의 문을 열고, 성공시키고, 다시 다른 음식, 음식점을 시도하고…. 사람들이 찾는 음식, 내가 만들고 싶은 음식들의 공통분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음식, 음식점 경영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음식에 대한 천착, 주방과 음식점 운영의 ‘짬밥’이 열쇠였다.

“주방 일을 잠깐 쉬고 있을 때는 식당 기획하는 일, 주방 시스템 짜는 일 등을 봤습니다. 서교동 ‘몽로’도 마찬가지였지요. 문학과지성사(문지사)에서 건물 지하에 식당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면, 어떤 걸 하면 좋겠느냐고 문의가 들어왔는데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결국 제가 들어가서 주방 일을 보는 걸로 결정했지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 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박찬일 조리사의 표현으로는, ‘A급 인생’을 사는 이다. 외식업에 관심이 많다. 그이가 자금의 상당 부분을 마련하고, 운영을 같이 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동업인 셈.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술집 요리를 내놓고 싶었다. ‘몽로’의 시작이었다. 세상사에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서교동 ‘몽로’는 대박이 났다.

“재정적으로 대단한 성공은 아닙니다. 조리사들 봉급 주고, 원하는 식재료 사 쓰고 해도 적자가 아닐 정도. 얼마간의 작은 이익이 납니다. 저는 힘들게 조리사가 되었습니다. 조리사 초기에 급료가 너무 적어서 원고 쓰는 걸로 생활비를 메우기도 했습니다. 후배들이 일할 만한 직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음식, 좋은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거꾸로 식당 직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도록 만들어야죠.”

‘광화문국밥’을 낼 때, ‘맨땅에 헤딩 하듯이’ 일을 시작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메늅니다.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이 편안한 한 끼 밥을 먹도록 하고 싶었고. 돼지국밥, 비빔밥, 냉면 등을 생각했는데 비빔밥을 돈 지불하고 먹는다는 걸 저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뺐습니다. 결국 국밥, 냉면 두 가지로 정했지요. 수육도 자연스럽게 정한 메뉴고.”

웃으면서 말한다. “그런데 냉면 뽑는 걸 면장 구하지 않고 맨땅에 헤딩으로 혼자서 해봤습니다. 냉면을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메밀과 다른 곡물 배합 비율을 정한 다음 혼자서 여러 차례 해봤지요. 유명한 냉면집들 면 뽑는 거 대략 감으로 알고 있으니까,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만들어봤지요. 현재는 메밀 90% 정도의 면을 내놓고 있습니다. 대단한 비법 레시피는 아닙니다. 통밀가루도 쓰고요.”

‘광화문국밥’을 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역시 ‘밥’이었다.

“점심시간에 100명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니까 제대로 만든, 마음에 드는 밥을 내놓기가 힘듭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어렵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음식공부를 했던 이. 스스로 ‘조리사 짬밥 19년’이라고 밝히는 그가 밥집 겸 술집 ‘몽로’와 더불어 한식 ‘국밥과 냉면’을 낸 것은 재미있다. 돌고 돌아 “밥이 가장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도 재미있다.

한식, 양식, 이탈리아 식을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지금 ‘박찬일의 음식과 음식점’을 만들고 있다. 서울 서교동의 ‘몽로’. 문을 열면서 김치에도 가격을 매겼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음식, 정성들인 음식을 무료로 내놓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캡션

-박찬일 조리사. 현재 서울 서교동의 ‘몽로’와 ‘광화문국밥’을 운영하고 있다. 식당 주방, 운영 19년의 ‘짬밥’이다.

-서교동 ‘몽로’의 돼지볼살

- ‘광화문 국밥’의 수육과 돼지국밥. 버크셔 K 품종의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 ‘광화문 국밥’의 냉면. 박찬일 조리사가 레시피를 구성하며, 메밀 90% 이상의 냉면과 대중적인 평양냉면이 있다.

- 자주 선보아는 어란 파스타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란구스또

생멸치파스타가 시그니처 메뉴다. 고등어파스타도 아주 좋다. 마치 프렌치처럼 각이 잡힌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후식은 프렌치만큼 정교하고 깔끔하다.

노아

서울 이태원 해방촌에 있다. “재료보다 뛰어난 조리사는 없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좋은 재료, 신선한 재료로 만든다. 좁은 공간에서 만드는 피자가 수준급이다.

이안스

젊은 조리사가 ‘가슴으로 만드는 음식’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서울 양재동 언저리. 무, 어란 등을 이용한 파스타가 독특하다. 쉽게 구하는 재료로 특이한 음식을 선보인다.

키친485

경력이 무거운 셰프가 자신의 음식을 만들고 있다. 생면과 건면을 적절히 사용하고 피자도 기본을 제대로 지킨 것. 심상치 않은 솜씨로 만든 수준급의 이탈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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