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289)] ‘신승반점’ 왕애주 대표
  • | 2017-08-19 07: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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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韓華) 중식당 역사 음식에 담겨… ‘공화춘’ 맥 이은 짜장면 등 선봬

‘산동회관-공화춘-신승반점’으로 최초 화교 중식당 변화 거쳐

우희광 ‘산동회관’ 열고 ‘공화춘’으로 바꿔 우홍장-우심진 이어가

‘신승반점’ 대표 왕애주, ‘공화춘’ 설립자 우희광의 외손녀

왕 대표 ‘음식 감각’ 뛰어나…한국 음식된 짜장면 등 신승반점 특색 살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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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은 오래 전의 ‘공화춘(共和春)’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지금의 ‘공화춘’과 예전 ‘공화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이나타운 ‘신승반점’의 안주인 왕애주 씨는 ‘공화춘’의 설립자 우희광 씨의 외손녀다. 짜장면이 예전 ‘공화춘’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조차도 부분적으로만 맞다. 왕애주 대표로부터 한화(韓華)의 삶과 짜장면 이야기를 듣는다.

‘공화춘’? ‘공화국의 봄’

‘공화춘(共和春)’은 ‘공화국의 봄’이다. 공화국은 중화민국, 지금의 대만이다.

우희광(1886∼1949) 씨는 중국 산둥성 출신의 화교다. 차이나타운 부근은 청나라 조계지였다.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에 살았다. 더러는 외지로 가서 일을 했고 또 상당수는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무역, 상업 관련 일을 했다. 중국 화교들이 모이는 곳이니 밥 먹을 곳, 잠잘 곳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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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여기저기 흩어져 일하던 중국 화교들도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인천 차이나타운 부근으로 왔다. 이곳에 ‘산동회관(山東會館)’과 ‘공화춘(共和春)’이 있었다. ‘산동회관’은 1908년, 공화춘은 1911년 혹은 1912년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수선한 시대였으니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는 않다. 오래 전의 기록들도 서로 내용이 어긋나기도 한다. ‘신승반점’의 왕애주 대표에게 ‘집안 이야기’부터 듣는다.

“외할아버지께서 1886년생이라고 하는데, 정확지는 않습니다. 1908년에 ‘산동회관’을 열었다고 하는데 그 이전부터 중국과 한국 인천을 잇는 뱃길을 따라 여러가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산 옷감이 호평을 받던 시절이다. 오늘날 한ㆍ중 간의 ‘보따리무역상’ 같은 이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비단 등 중국 옷감들이 한반도로 흘러오고 때로는 높은 이자를 기대하는 중국 돈도 건너왔다. 인천 차이나타운 지역은 이런 이들을 위한 통로였다.

‘화교 우희광’은 이곳에 ‘산동회관’을 열었다. 기록대로 1886년생이면 22세의 이른 나이에 제법 큰 ‘산동회관’의 문을 열었다. 그 이전에도 무역업을 했다니 좀 이상한 연대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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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대로 1868년 언저리 출생이라면 우희광 씨는 3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왕애주 대표는 “집안에서, 외할아버지는 20대 후반부터 한반도를 오갔고, 30대에 한반도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들었다”고 전한다.

1905년, 혹은 1908년 경 문을 열었던 ‘산동회관’은 1911년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꾼다.

쑨원(孫文, 손문)은 1911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성립을 선포한다.

분명한 것은 ‘공화춘’이라는 이름은 쑨원의 중화민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점. 늦어도 1912년 ‘공화춘’은 탄생했을 것이다.

불분명한 부분도 있다. 왕애주 대표는 ‘산동회관’의 설립 일을 1905년으로 듣고, 기억하고, 기록들에는 1908년이라고 나타난다. 이 부분 역시 세금문제 등으로 등록을 미루는 일들이 많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야 될 터이다. 어수선한 시절에 일어난 불분명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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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춘’에서 짜장면을?

“짜장면이 공화춘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틀렸다. ‘공화춘’에서 짜장면도 팔았다, 는 표현이 맞다.

짜장면은 중국 작장면(炸醬麵)이다. ‘자장미엔’ 정도로 발음된다. ‘자장미엔’이 한국 짜장면의 뿌리다. ‘자장미엔’은 중국 서민음식이다. 국수에 첨면장(甛麵醬)을 볶아서 얹은 것이다. 국수는 밥이고 첨면장은 한국인의 된장이다. 국수에 볶은 첨면장을 얹는 것은, 가난하던 시절 한반도 여기저기서 식은 밥, 보리밥에 된장찌개 한두 숟가락 얹어서 비벼먹는 것과 같다.

고단한 서민들의 간편한 한 끼 식사. 짜장면을 ‘산동반점’ 혹은 ‘공화춘’에서 시작했다는 표현은 틀렸다. 길거리 리어카에서도 팔고, 화교 가정에서도 편하게 먹었던 음식이다. 다만 인천의 청나라 조계지역에 있었던 ‘산동회관’과 이름을 바꾼 ‘공화춘’에서 팔았던 숱한 음식 중 하나다.

오랫동안 중국음식은 우리에게 청요리(淸料理)다. 1960∼70년대까지도 중식당보다는 ‘청요릿집’이 친근했다. 전채, 메인 요리를 먹은 다음, “식사는 뭘로?”라는 질문에 “난 짜장면, 중화우동, 짬뽕, 기스면, 유니짜장, 만두” 이렇게 각각 주문했다. 마지막에 먹는 식사 중 하나가 바로 짜장면이었다.

1955년, 한반도에는 밀가루가 흔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잉여농산물인 밀가루를 가난한 한반도에 대량으로 공급했다. 1955∼1965년 사이. 분식이 시작되고 여기저기 짜장면, 중화우동, 짬뽕, 칼국수, 수제비 등이 흔해지기 시작했다. 중식은 이 무렵 탈바꿈한다.

1970년대를 넘기면서 가난한 한국인들이 중식당에 취직한다. 이들이 중식, 그중에서도 탕수육 등 요리와 짜장면, 짬뽕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짜장면, 짬뽕은 널리 퍼진다. 지금도 유명한, 널리 쓰이는 ‘사자표춘장’은 이때 한국식 첨면장, 첨장인 ‘춘장’을 대량으로 만들어 공급한다. 짜장면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1983년 ‘공화춘’ 문을 닫다

“제가 알기로는 인천 관공서가 이전하고, 차이나타운 경기가 좋지 않아서 ‘공화춘’의 문을 닫은 걸로 기억합니다.”

1983년. 인근의 관공서가 이전하면서 차이나타운 일대는 어려워졌다. 경영이 어려워지니 결국 문을 닫기로 결정한다. “‘공화춘’이 문을 닫고 가게를 운영하던 우희광 씨 가족들이 대만으로 갔다”는 표현이 인터넷에 보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들이 다시 돌아와서 ‘신승반점’의 문을 열었다는 표현도 틀렸다.

우희광 씨는 1남5녀를 두었다. 그중 아들 우홍장 씨가 ‘공화춘’을 물려받았다. 이 가게를 다시 손자 우심진 씨가 물려받아서 운영했다. 우희광-우홍장-우심진 3대는 ‘공화춘’을 세우고, 발전시키며, 한편으로는 인천 화교 사회에도 활발히 개입, 많은 활동을 했다.

우희광 씨의 1남5녀 중 막내가 왕애주 대표의 어머니 우란영 씨다. 1946년 생. 우란영 씨는 화교 왕입영 씨와 결혼, 1남2녀를 두었고 그중 맏딸이 왕애주 씨다.

30대 중반의 나이까지 왕입영, 우란영 부부는 ‘공화춘’에서 일을 했다. ‘신승반점’이 오래전 ‘공화춘’의 맥을 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0년 ‘공화춘’ 주방에서 일하던 왕입영 씨는 독립해 ‘공화춘’ 인근에 가게를 연다. ‘신승반점’이다.

“외할머니만 살아 계실 때였는데 ‘공화춘’이라는 이름을 같이 쓰겠다고 하니 반대하시더라고요. 나중에 ‘공화춘’ 문을 닫았을 때도 우리가 ‘공화춘’ 건물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그것도 반대하시고.”

오래 전 일이니 섭섭할 것도 없지만, 이때의 결정이 결국 ‘공화춘’ 이름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경영난으로 ‘공화춘’의 문을 닫고 왕애주 사장의 외사촌 오빠인 우심진 대표는 신포동 언저리에 ‘중화루’의 문을 연다.

“나중에 ‘공화춘’ 이름을 등록하려니까 이미 누가 등록을 해버렸죠. 그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으면 우리가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세금을 내거나 법적으로 건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쓰던 이름을 잃어버린 거지요.”

2012년 4월 세운 ‘짜장면 박물관’이 바로 우희광 씨가 운영하던 ‘공화춘’의 옛 자리다. 옛 자리 일부에서 장사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왕애주 대표 일가는 거부했다. 그보다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우희광 씨에 대한 작은 기념물 혹은 기념공간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짜장면 박물관’에는 1960년대 주방 모습과 ‘우희광 기념홀’이 있다.

13세 어린 소녀, 국수를 직접 뽑아 먹다

왕애주 대표는 대만에서 대학교를 다녔고 2004년, 부모님이 운영하던 ‘신승반점’을 물려받았다.

“대부분의 화교 가정이 그렇듯이 아들, 딸들에게 중식당을 물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대만에 가서 일본어 전공을 하고 통역, 무역 일을 했습니다. 원단 관련 회사에서 일을 했지요.”

어린 시절부터 ‘음식에 관한 감각’은 있었다.

“열세 살 무렵에 혼자서 국수를 뽑아서 먹곤 했어요. 학교가 가까웠으니까 점심시간이면 쪼르르 가게로 와서 혼자서 국수 뽑아서 짜장면 만들어먹고 다시 학교로 가서 오후 수업하곤 했어요.”

음식에 관한 감각은 술에 대한 감각과도 통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량주, 포도주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손님이 가져오신 고량주 병을 두드려 보고 그 소리로 잘 익었다, 덜 익었다는 걸 알아내곤 했습니다. 지금도 병이나 독을 손으로 두드려보면 어느 정도 숙성되었는지 거의 알아냅니다.”

‘신승반점’ 집안 이야기는 늘 궁금했다. 이제는 한국 음식이 된 짜장면을 이야기하면 어쩔 수 없이 ‘공화춘’, 우희광 씨 그리고 ‘신승반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짜장면은 이제 한국식 춘장을 사용하는 한국음식이 되었다. 중국에도 전통방식의 첨면장을 사용하는 집은 사라졌다. 중국 수입 첨면장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신승반점’의 시그니처 메뉴 ‘유니짜장(肉泥炸醬)’을 한 그릇 청했다. 곱게 간 돼지고기를 춘장과 볶아서 사용한다. 한국식 짜장면이다. 중국에도 비슷한 음식은 있을 터이나 짠맛을 줄이고 고소하고 단맛이 도는 유니짜장은 한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화교들이 널리 유행시킨 것이다. ‘신승반점’의 유니짜장. 고소하면서 은은하게 달고 담백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설명

-‘신승반점’의 왕애주 대표. 2004년 무렵, 신승반점을 물려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왕애주 대표의 어머니가 ‘공화춘’의 설립자 우희광 씨의 막내딸이다.

-차이나타운 입구에 있는 ‘신승반점’

.

-‘신승반점’의 시그니처 메뉴인 유니짜장이다. 한반도의 화교들이 개발해 널리 퍼뜨린 음식이다.

-‘신승반점’ 짬뽕

-‘신승반점’ 탕수육. 이른바 ‘부먹’ 상태로 나온다. 맛이 과하게 달지 않고 은은한 맛을 낸다.

[서울 화교 노포 4곳]

매화

명동 언저리 ‘금락원’이 시초. ‘금락원’ 창업주, 아들, 손자가 연이어 중식당을 운영했다. 아들, 손자 대에 서울 연희동 리틀차이나타운에 자리 잡았다. 굴짬뽕도 아주 좋다.

개화

서울 명동 지역에서 50년 이상 중식을 내놓고 있다. 오래 전 이 가게를 드나들었던 단골들은 나무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던 2층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오향장육이 압권.

안동장

서울 을지로 통의 화교 노포다. 겨울철 굴짬뽕과 맵지 않은 짬뽕이 아주 좋다. 수교자, 물만두도 중국식으로 내놓는다. 비교적 강하지 않은 맛의 중식이다.

신승관

50년을 넘긴 화교 노포다. 시금치 만두, 해삼주스 등을 처음 개발, 널리 알렸다. 피맛골에서 북창동을 거쳐 종로로 이전했다. 3대 사장이 운영 중. 짜장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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