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직거래 장터가 열리는 ‘마르쉐’ 가을 하늘과 풍성한 맛이 어우러지다

채소시장에 나오는 채소들은 가짓수가 많지만 양을 많이 쌓아두고 팔지는 않는다.

여러 곡식과 과일이 제맛을 터트리는 가을에는 농부와 직거래 장터가 열리는 ‘마르쉐’로 가보자. 이맘때의 높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갓 따온 신선한 재료의 풍성한 맛과 향이 어우러져 방문자의 몸과 마음에도 활기가 깃든다.

와인, 치즈, 샤르퀴트리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고유의 미식 장르가 있는 나라들, 이를테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도시의 사람들은 사실 레스토랑보다 시장에 더 자주 간다. 맛있는 음식이란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굳건한 믿음을 기반으로 셰프들은 물론 요식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도 주말이면,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을 때면 언제나 시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특히 주말에는 동네마다 크게 열리는 농부와의 직거래 장터가 있어 부지런한 식도락가들은 단골 상인들에게 도움을 얻어 그날의 요리를 정하거나 레시피를 전수받기도 하면서 남다른 탐식 생활을 실천해간다. 유럽 도시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이른 아침의 시장 방문을 권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화 속의 활기가 경험해 볼 만하기 때문일 테다. 기쁘게도 요즘은 서울에서도 꾸준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열리는 농부와의 직거래 장터가 많다. 그 중에서도 ‘마르쉐’는 어느새 9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시장이다. 프랑스어로 시장을 뜻하는 ‘마르쉐’는 환경운동가와 문화 기획자들이 모여 만들었다. 기존의 환경운동가들이 주장해온 것들은 대부분 환경에 해가 되는 것을 ‘하지 말자’는 방향이었다면 ‘마르쉐’를 꾸리게 된 이들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잘 살아갈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옥상 텃밭을 일구어 작물을 내는 등의 도시 농부들을 만나 시장을 연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친환경 농가와 요리사, 수공예가 등 100여개의 팀이 참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많은 이들이 찾는 행사가 된 만큼 그 종류도 세분화됐다.

‘마르쉐 농부시장 @혜화’는 매달 두 번째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농부와의 직거래 장터다. 1차 생산물을 판매하는 농부들이 직접 가판에 생산한 것들을 늘어놓는다. 옆에서는 이를 사용해 2차 가공품을 만드는 요리사, 수공예가들도 함께 한다. 아티장 치즈를 만드는 한남동의 레스토랑 ‘치즈플로’에서는 산양유를 생산하는 ‘모심목장’ 옆에서 산양유 치즈를 판매하고, 수공예가는 농가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패턴 앞치마, 테이블보 등을 함께 선보이는 식이다. 좋은 재료에 환경과 사람에게 건강한 방식으로 만든 가공품까지 만날 수 있으니 시장을 찾는 이들이 많아 마로니에 공원을 가득 메운다.

채소시장에 나온 루콜라.

또 올해부터 매달 첫 번째 토요일과 네 번째 화요일에는 각각 성수동의 성수연방, 합정동의 무대륙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채소시장’이 있다. 농부들의 1차 생산물들로만 꾸린 행사로 보통 20여개 농가가 함께한다. 채소시장에서는 다채롭고 신선한 제철 식재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이를 직접 재배한 농부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쉐에서는 농부들이 시장에 나오기 전, 소비자와의 대화를 어려워하는 농부가 있다면 미리 도움을 준다. 생산자들은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 말할 기회가 적은 편이라 준비가 안 된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농가에서 어떤 재료를 어떤 식으로 요리하고, 어떻게 작물을 키웠는지 미리 묻고 소비자를 만났을 때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농부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별다른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또 셰프처럼 전문 요리사가 소비자로 찾아오는 경우에는 농법이나 조리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가기도 한다고. 기존에 해오던 방식대로 재배한 상추, 애호박, 오이 등을 갖고 시장에 나왔던 한 농가는 시장을 찾아온 셰프들과의 대화를 통해 농법을 바꾸고 보다 다양한 작물 재배에 도전했다. 루콜라, 처빌 같은 이국의 채소, 허브 종류들은 처음 키운 것을 시장에 가져와 나눠주며 소비자가 원하는 맛과 모양인지를 알아보는 등 마르쉐를 통해 농가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이 재료를 공급받은 셰프는 훌륭한 요리로 식도락가들에게 기쁨을 줄 테다.

10월 첫째 주 성수연방에서 열린 채소시장에 가보니 지금 먹으면 가장 맛있다는 잣, 생강, 쑥, 송화버섯, 고들빼기 같은 재료들이 눈에 띄었다. 소비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해온 농가들에서는 작두콩에 관심을 보이니 끓여 차로 마시면 환절기에 약해진 기관지에 도움을 준다는 팁이 들려오고, 보통 마트에서 보던 가지와 달리 짤뚱하니 동그란 가지가 신기해 들여다보니 먹기 좋게 잘라 그대로 구워 먹어도 맛있고 중화풍의 볶음 요리를 해 먹어도 좋다는 레시피 제안이 솔깃하다. 함께 판매하는 향신 채소들 중 고수 한 다발과 가지를 함께 구입했다. 신선한데다 가격도 저렴한 편, 종이봉투에 담아준 채소들은 미리 준비해 간 장바구니에 챙겼다. 마르쉐는 일회용품 규제가 엄격한 편이다. 채소를 구입해도 비닐 봉투에 담아주는 경우는 없고, 방문자가 미리 준비해 온 장바구니를 사용하도록 미리 공지한다. 사과주스를 파는 곳에 가면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스테인레스 컵에 담아주는데 다 마신 뒤 반납하면 된다. 케이크 가게에서는 담을 그릇을 가져오면 쿠키를 서비스로 주고, 후무스를 파는 가게에서는 다 먹고 나서 후무스가 담겨 있던 유리병을 가져오면 1000원을 돌려주는 식. 그러니 이곳에 갈 때는 장바구니와 접시, 텀블러를 준비하면 덤이 많다.

이른 아침부터 채소시장을 찾았다면 11시부터 예약을 받기 시작하는 100인분의 채소 점심을 신청해 맛보면 좋겠다. 채소시장의 별미로 꼽히는 채소 점심은 매번 다른 요리사를 초청해 그날의 채소시장에 나온 식재료들로 차려진다. 이번에는 생강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렇게 맛있고 멋진 채식이라면>의 저자 신주하가 참여했다. 채소 농사를 많이 짓는 경상북도 경산에 작은 작업실을 두고 제철의 채소를 먹는 ‘샐러드 클럽’, 좋은 식재료를 소개하는 ‘코송박스’, 채식 쿠킹 클래스인 ‘생강의 채소수업’을 운영하는 그녀의 레시피는 채식주의자는 물론 신선한 제철 요리를 즐기는 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경산까지 가지 않고도 맛볼 수 있었던 신주하 작가의 채소 점심 메뉴는 채소 시장에 나온 ‘베짱이농부’의 이탈리안 파슬리, 루콜라, 고수, ‘가평신선잣’의 유기농 잣, ‘농부가된사진가’의 허브꽃을 사용한 중동식 채소밥과 샐러드였다. 흔히 채식 요리는 푸성귀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중동에 살았던 경험을 살려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는 신주하 작가의 요리는 풍성했다.

당근, 감자, 가지, 밥을 냄비에 층층이 쌓아 중동식 향신료를 넣은 냄비밥으로 짓고 거꾸로 엎어 먹는 이 채소밥은 중동에서는 여러 사람이 있을 때 나누어 먹는 대표적인 요리라고. 케이크처럼 한 조각씩 담아주는 채소밥에 비트와 무화과, 석류, 오랜지꽃즙 절임, 루콜라와 이탈리안 파슬리 샐러드를 곁들였다. 질 좋은 올리브유를 둘러주는 클래식 후무스는 맛이 유독 짙고 고소했다. 크래커와 함께 먹는 서너 가지 종류의 후무스와 딥을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기도 했는데 중동식 레스토랑에서도 흔히 맛볼 수 없던 독특한 풍미가 매력적이었다.

한편 이렇게 정기적으로 열리는 농부시장과 채소시장 외에도 7월과 11월이면 마르쉐에서 여는 특별한 장이 있다. 우리 밀이 수확되는 시기인 7월 말마다 열리는 ‘햇밀장’과 쌀을 비롯한 토종 작물을 소개하는 11월 말의 ‘토종장’이다. 좋은 작물을 만들어도 이를 알아주고 찾는 이가 없다면 사라질 테니 자급률이 0.8% 정도인 우리 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열리는 것이 ‘햇밀장’이다. 햇밀장에는 전국 10개 농가와 제빵사들이 햇밀로 만든 빵을 들고 나온다. 최근 보존제나 발효 촉진제 등의 화학 물질을 넣지 않고 만든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는 것처럼 햇밀장에 나온 농가들은 농약이나 제초제, 비료를 사용하는 대신 볏집을 발효한 퇴비를 사용하는 등 자연의 힘으로 재배한 우리 밀을 소개한다. 이렇게 재배한 우리 밀을 찾는 이가 늘면 다양한 미생물이 활동하는 건강한 땅도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햇밀장에 나온 통밀 식빵, 스콘, 천연 발효빵 등은 발효 시간, 제분 방법 등 우리 밀을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제빵사들의 고민이 담겨 그 맛을 더한다. 11월의 ‘토종장’은 오랜 시간 이 땅에서 키워온 1200여종의 토종 벼를 알리기 위한 자리다. 토종 쌀 10여 종으로 밥을 지어 맛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다양한 맛과 향에 놀라게 된다고. 그밖에 30여 종의 꿀을 선보이는 ‘꿀장’이나 개량종에 밀려 보기 드물어진 토종 씨앗을 한데 모아 소개하는 ‘씨앗장’이 열리기도 한다니 소식이 궁금한 이들은 마르쉐의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 공지를 눈여겨보면 좋겠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이도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클릭 한 번이면 그 다음 날 새벽에 배송해준다는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장을 보는 것이 일상인 요즘, 나날이 많은 사람이 모여 활기를 더해가는 ‘마르쉐’의 매력이 궁금하지 않은가. ‘마르쉐’ 장터에 가면 농작물이 겪어온 시간을 아는 농부의 이야기가 바닷가의 파도소리나 바람처럼 선명하게 오감을 자극하는 가을의 풍경이 되어 넘실거린다.

김주혜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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