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

왠지 고민이 생길 때 찾아가면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멘토의 느낌이 강했다. 영화 ‘윤희에게’(감독 임대형, 제작 영화사 달리기) 개봉 직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는 내면의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현명한 사람이었다. 무조건 안아주며 다독여주기보다 고민을 경청한 후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을 제시해줄 ‘인생의 선배’다웠다. 무르익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한 영화 속 연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으로도 ‘원숙미’가 넘쳤다.

영화 ‘윤희에게’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모녀 윤희()와 새봄(김소혜)이 엄마 윤희의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로드무비 형식의 감성멜로물. 어느 날 엄마의 첫사랑이 보낸 편지를 몰래 읽은 새봄이 윤희에게 편지를 보낸 첫사랑이 사는 지역으로 여행을 제안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는 특유의 풍부한 감성 연기로 낯선 도시에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고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조심스럽게 꺼내 드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는 파격적이면서도 순수한 감성을 지닌 시나리오에 반해 출연을 결심했다. “정말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이 연상됐어요. 어떻게 이리 깨끗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녀의 로드무비라는 점도 새로웠고요. 흙 속의 진주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감독이나 출연배우, 흥행성 등과 다른 제반 요건은 전혀 따질 필요가 없었어요.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대형 감독이 시나리오까지 썼는데 결혼도 안한 남성인데 모녀의 감정을 어떻게 그리 섬세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쓸 수 있을까 놀라웠어요. 정말 재능이 넘치는 천재 같아요. 또한 영화를 대하는 자세도 참 겸손하고 마음도 순수하고 깨끗하더라고요. 앞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좋은 영화를 만들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와 딸 새봄을 연기한 김소혜는 기대 이상의 완벽한 모녀 케미를 선보인다. 실제 아들 둘만 갖고 있는 에게 친구 같은 딸로 등장하는 김소혜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 과정은 왠지 대리만족을 선사해줬을 듯하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 는 모든 인터뷰 기사를 모니터하는 아들들이 서운할까 염려돼선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제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기사를 다 읽어봐요. 조금이라도 자기들 이야기 나오면 민망한지 ‘우리 이야기 절대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새봄이 같은 딸이 있으면 정말 좋겠죠. 그러나 내가 안 갖고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감사하면서 살려고 해요. 김소혜는 영화에 캐스팅되고 나서 만나기 전에는 잘 몰랐어요. 평범한 우리 나이 사람들처럼 아이돌 그룹을 잘 모르거든요. 근데 일찍 사회생활을 해선지 나이가 스무 살인데 철이 일찍 들었더라고요. 어른 같았어요. 또한 연기를 진짜 잘해 후배보다 동료 배우의 느낌이었어요.”

영화 ‘윤희에게’는 아무리 까도 새살을 드러내는 양파처럼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면서 강렬한 반전을 만날 수 있는 작품. 베일에 가려진 엄마 윤희의 첫사랑의 정체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영화 초반부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배우로서 연기하기에는 매우 힘든 캐릭터였을 터. 는 촬영 전 영화 ‘캐롤’ ‘콜미바이유어네임’ 같은 영화를 보며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나이가 드니 갈수록 감성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자꾸 관조적인 태도를 갖게 되죠. 시야는 넓어지고 깊이는 깊어진 느낌인데 예전처럼 그렇게 감성이 부드럽지는 않죠. 그래서 촬영 전 감성을 터치하는 작품들을 많이 보려고 노력했어요. 윤희는 비밀을 감추고 있다가 준을 만나면서 숨겨뒀던 감정이 한꺼번에 둑이 무너지듯 터지게 되죠. 그걸 어떻게 표현해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 혼자 감정의 담금질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의 나이가 지천명을 넘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아는 사실. 무려 36년 동안 배우의 길을 걸어온 그는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파격적인 캐릭터를 맡는 걸 주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에는 피했던 스크린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사전 제작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한창 촬영 중인 그는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는다. “매 작품 이게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촬영에 임해요. 정말 제 나이의 여배우가 ‘윤희에게’ 같은 영화를 만난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그래서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어요. 실컷 했기에 여한은 없어요. 배우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에요. 자신의 의지만 있다고 원하는 걸 할 수 없어요. 커리어에 맞는 기회를 기다려야 해요. 20~30대 때는 영화와 인연이 잘 닿지 않았어요. 40대 중반 이후에라도 기회가 생기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앞으로 일하고 싶은 감독요? 전 남의 밥그릇을 탐내지 않아요. 저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죠.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감독이 최고예요. 임대형 감독과 ‘부부의 세계를 함께 촬영 중인 감독님들이 저에게 세계 최고의 감독님들이에요.”

영화 ‘윤희에게’를 보다보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믿느냐“고 묻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영원한 사랑요? 사랑은 변한다고 생각해요. 죽을 때까지 해로해서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운명이고 축복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죠. 모든 건 영원한 건 없고 절대적인 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한다고 생각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 사진=리틀빅픽쳐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