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를 만든 명민한 수상들의 책략》

포함외교의 원조 팔머스턴 수상.
공자는 ‘정치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것이다(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확립하고,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를 전개한 군주다운 군주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수상들은 격동하는 세계 질서에 대응한 명민한 책략을 통해 영국 국가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를 전 세계에 널리 울려 퍼지게 한 신하다운 신하들이었다.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내각책임제이자 입헌군주제를 택한 나라이다. 입헌군주제는 왕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 받는 정치체제다. 영국의 국왕은 관습적으로 장관의 임명권과 군 통수권, 의회해산 권한을 가진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의 수상 임명 권한은 전적으로 국왕에게 있지만 국왕은 총선에서 하원 과반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국가경영권을 맡긴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근대적인 정당의 시작도 영국의 토리당(Tory)과 휘그당(Whig)에서 찾을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전인 1832년의 선거법 개정으로 토리당은 보수당(자본가, 지주 대표), 휘그당은 자유당(산업가, 소시민 대표)을 자임하며 출발했다. 우파, 좌파라는 표현은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의 의회내 좌석배치에서 유래한다. 1918년 이후 휘그당은 노동당으로 흡수 대체돼 1945년 이후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대 정당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수상제도가 도입된 1721년 이후 2020년 현재까지 영국에서는 모두 77대의 수상이 배출되었으며, 이 중 보수당이 40, 진보당이 37이다. 보수와 진보의 세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셈이다.

강장 밑에 약졸은 없다고 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동안 수상이었던 사람들 모두 여왕에 대해서는 충성심이 가득했고, 영국과 여왕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경륜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책략을 펼쳤다. 빅토리아 여왕 64년 재위기간(1837~1901년) 중 모두 20 차례의 개각이 있었으며, 중임을 포함하여 10명의 수상들이 평균 6년 반 재임했다. 보수와 진보의 숫자는 절묘하게 10 대 10이었다. 이중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4회,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와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3회, 존 러셀, 벤저민 디즈레일리, 그리고 팔머스톤 자작 헨리 존 템플 2회 등이 중임 이상이다.

빅토리아여왕은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인사원칙을 어느 정도 지킨 셈이다. 시대가 인걸을 만들기 보다는 인걸이 시대를 만든다고 하던가. 명재상으로 회자되는 팔머스톤,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톤 수상들의 노련한 경륜과 신뢰정치, 명석한 논리와 설득력 있는 연설을 통해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를 만들었다.

팔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수상재임 제1차 1855∼1858, 제2차 1859∼1865)은 ‘팔머스턴 경(‘파머스턴’으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발음대로 ‘팔머스턴’으로 표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팜 Pam’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23세인 1807년 하원의원으로 출발부터 81세인 1865년에 사망할 때까지 거의 계속해서 당과 정부의 요직에서 활약했다. 포틀랜드 공작 내각에서 해군성 차관으로 시작하여 스펜서 퍼시발 내각에서는 20년 간 동안 전쟁장관을 맡았다. 찰스 그레이 내각부터는 20년(1830∼1834, 1835∼1841, 1846∼1851) 외상을 맡았다. 업무수행방식이 거칠어서 포함외교(砲艦外交)와 ‘자유주의적 개입외교’의 원조로 불린다.

포함외교의 대표사례는 1850년 그리스 정부에 대한 유태계 영국인 돈 파시피코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관련하여 그리스를 해상 봉쇄한 사건이다. 그는 위대한 연설가였다. 약간 어눌했지만 하원의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말을 적시에 동원하여 사자후를 토하곤 했다. ‘돈 파시피코 사건’ 때 팔머스턴은 의회에서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로마제국의 영향력에 비교해가며 “영국국민은 어디서나 불의와 부정에 대항하여 영국정부의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것이 유명한 ‘나는 로마시민이오’ 연설이다.

그는 영국이 자유주의적 상업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시장 획득을 위해 강온 양면 외교전략을 구사하던 시기에 외상과 수상으로서 영국의 외교정책을 선도했고, 아편전쟁을 이끌었다. 멜버른 내각의 외상이던 팔머스턴은 중국무역을 안정된 기초 위에 두는데 필요한 조건 획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청나라를 침략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더럽고 부도덕한 전쟁’인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요약하면 인도의 아편으로 중국의 홍차대금을 치르자는 것이 영국의 속내였다. 1840년~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맺은 1842년 8월 난징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다.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로 불리던 팔머스턴의 공격적인 조치들 중 일부는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이던 팔머스턴 경의 말이다. “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치열한 국제관계에서도 통용되는 무서운 철칙이다.

팔머스턴 외상이 수상이 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중국과 인도는 영국의 영토 확장정책에 거점국가가 되었다. 크림전쟁으로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1856년~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을 개시하였다. 영국은 청나라 남부 연안의 전역을 방위한다는 이유를 들어 군대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미국 남북전쟁에 대하여 팔머스턴 수상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 연합의 연방이탈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연방이 해체되면 미국이 약화될 것이며 남부 연합 지역은 영국산 공산품을 위한 막대한 시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팔머스턴 수상은 미국의 남부 연합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팔머스턴 수상은 노예제도 폐지론자였으며, 노예무역 폐지는 그의 외교정책의 가장 일관된 요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영국에서 재임 중에 사망한 최후의 수상이었으며, 1865년 10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왕족이 아닌 자로서 국장이 치러진 경우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과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 및 워털루 전투의 영웅 웰링턴 공작에 이어 네 번째였다.

벤저민 디즈레일리(수상재임 제1차 1868, 제2차 1874~1880)는 1832년 정치에 입문해 몇 차례 낙선을 거듭한 후 1837년에 33세로 토리당 소속 하원의원이 되었다. 1841년 토리당 내에 청년 영국단을 조직하였고, 1846년 자유무역주의를 대표하는 로버트 필의 곡물법 폐지에 반대하고, 국가가 관세 등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 무역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보수당을 개혁하면서 세 차례 수상을 역임한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내각에서 세 차례 재무상을 지냈다.

그는 1868년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의 후임으로 수상이 되었으나, 같은 해 자신이 주도한 선거법 개정에 의해 치러진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단명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절치부심한 끝에 1874년 선거에서 대승하여 제2차 내각을 조직하였다. 디즈레일리 수상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수에즈운하를 영국 소유로 만든 것이다.

영국은 수에즈운하 건설비용으로 파산한 이집트 정부로부터 수에즈운하회사 지분을 매입했다. 운하건설과 국가간 갈등 조정, 자본조달 등 재주는 프랑스와 이집트가 부렸지만, 실속을 채운 건 호시탐탐 지켜보던 영국이 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외교관 드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책략이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수에즈운하책략으로 바뀐 것이다. 수에즈운하를 손에 넣음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은 동방 항로를 확보하였고, ‘3C 책략’(이집트의 Cairo-남아공의 Cape Town-인도의 Calcutta를 연결한 세계전략)을 추진하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1876년 ‘왕실칭호법’을 제정하여 영국령 인도제국과 영국을 다스리는 황제칭호를 빅토리아여왕에게 헌납했다. 디즈레일리 수상의 책략으로 수에즈 운하와 인도는 영국의 ‘아시아시장진출’을 위한 교두보 노릇을 하게 되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수상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올려놓았다. 디즈레일리 수상은 글래드스턴 수상과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기를 리드했고, 전형적인 양당제에 의한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 영국정치를 안정시켰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흥미가 있어 때때로 정치소설을 썼는데, 1826년 소설 《비비언 그레이》를 발표하여 문명을 얻었다. 디즈레일리의 뛰어난 웅변과 어록은 유명한데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 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이다”라는 말이 대표적인다.

수에즈운하와 인도책략을 추진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톤(수상재임 제1차 1868~1874, 제2차 1880~1885, 제3차 1886~1886, 제4차 1892~1894)은 대평민(大平民)이라 불렸던 정치가이다. 윈스턴 처칠, 벤저민 디스레일리 등과 더불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로 꼽힌다.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32세 때부터 20여 년간 재무상, 상무상, 식민상 등 주요부처의 장관을 역임했으며, 네 번에 걸쳐 수상을 맡았던 인물이다. 직업이 장관이요, 수상인 셈이다. 리버풀의 큰 상인으로 하원 의원을 지낸 아버지 존 글래드스톤의 권면으로 정계에 투신해 1833년 24세에 보수당원으로서 하원의원이 됐다. 필 내각의 재무국장을 거쳐 식민차관으로 승진했다.

1840년 영국 내각이 청나라와 아편전쟁을 감행하려고 하자,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아편전쟁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몇 표 차이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격론을 일으켰다(출처,《Wikipedia》).

이후 상무원 부총재 겸 조폐국장관, 상무상, 식민상, 재무상 등을 역임했다. 재무상 시절 해마다 명쾌한 재정 연설로 의회 내에서 부동의 리더 지위를 확립하였다. 1867년 존 러셀이 은퇴한 후, 자유당 당수가 되었고,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쌍벽을 이루며 전형적인 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자유주의와 도덕정치를 중시했던 그의 관점은 영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그에게 G.O.M(Grand Old Man)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 했지만, 말년에는 역효과를 불러 실각에 이르게 된다. 62년간의 정치 생활에서 은퇴한 뒤에는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려 할 때 이를 사양했다. '대평민'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외교 정책에 있어서 디즈레일리의 강경 정책에 대항해 평화주의 정책을 펼쳤고, 내치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은 이들 수상 덕분에 19세기 유럽 대륙에 불어 닥친 혁명의 바람을 피해 무사히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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