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회고전…8월4~12월1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청다색, 25×65㎝ 마포에 유채, 1981.
“감동이란 인간사 희비애락(喜悲哀樂)과 같다. 희(喜)는 곧 차원을 뒤집으면 비(悲)가 아닌가? 즉 가장 아름다운 것은 희(喜)요 곧 비(悲)이다. 그래서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슬픈가보다. 그래서 가장 슬프면 눈물이 나고 가장 기뻐도 눈물이 나오게 마련인가보다.”<1980년 7월5일 윤형근 일기 中>

한국단색화거목 ‘윤형근’회고전은 평일임에도 관람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8월 4일 오픈해 12월 16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회화와 드로잉 각각 40여점, 아카이브 10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지하1층 전시장엔 회화, 2층엔 작가의 거실공간을 옮겨온 아틀리에와 ‘윤형근: 삶과 예술’영상이 나왔다. 화가 윤형근(1928∼2007)은 충북 청주서 태어났다. 4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 스승 김환기(1916∼1974)와 만나게 된다.

미군정이 주도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했고 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창시절 시위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부정입학 학생의 비리를 따져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이후 만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제작을 시작한다.

“숙명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사건 이후 10년, 유신시절에 윤형근 그림이 만들어졌다”라고 최종태 조각가는 영상에서 밝히고 있다.

(왼쪽)1980년 서교동 화실에서 윤형근 화백. 드로잉, 49×33㎝ 한지에 유채, 1972 <자료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예술은 심심한 거여

1974년은 외로운 화가의 길을 함께한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난다. 윤형근 작가가 처음 서울대 입학시험을 보러 간 날, 시험 감독관이었던 김환기와 처음 조우했다. 그 후 윤형근이 제적당하고 홍익대로 편입할 때에도 스승은 그를 이끌었다. 60년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함으로써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7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빵당전’에 ‘다색과 청색 No.39’등을 출품한다. 이때 한국을 방문한 조셉 러브(Joseph Love)가 일본에 돌아가 도쿄화랑 야마모토 타카시(山本孝)에게 윤형근 작가를 소개했다. 이후 77년 8월 도쿄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단면전’에 출품한다. 윤 화백은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구도는 문(gate)”이라고 명명했다.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의 색인 암갈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들이다.

“낙엽이 다 지고 나목의 숲속에 산비탈에 거목이 넘어져서 썩어가는 것을 봤다. 한쪽은 이미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 빛깔은 흙 빛깔과 다름없었다. 그 나무가 쓰러진 것으로 보면 꽤 오랜 세월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숙연해 졌다”라고 윤 화백은 일기에 적었다.

한편 신용덕 미술평론가는 영상에서 ‘선생에게 미술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예술은 심심한 거여”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그 말이 이해가 잘 됐어요. 원재료가 가지고 있는 그 맛이 아주 잘 드러나서 길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어떤 농도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열심히 스며들어가보는 거죠. 아주 단순한 일을 오래 깊이 지속해야 한다는 거죠.”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