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요인물, 이세보(李世輔)가 이해랑의 작은 증조부

이해랑은 “우주처럼 광대하게 사유하고 별처럼 작게 표현하라”는 예술의 절제원칙 연극론을 남겼다.
배우이자 연극연출가 이해랑(李海浪, 1916∼1989)은 한국리얼리즘을 한층 심화, 성숙시킨 인물이다. 일제말엽~해방~6·25전쟁을 거치면서 신극사(新劇史) 맥을 이어왔고 농어촌구석구석 이동극장운동(移動劇場運動)을 6년 동안 전개했다. 특히 배우의 도덕적 품성을 중시하며 인격주의를 강조한 것은 오늘날 시사 하는바가 크다. 연극이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어떤 주의(主義)의 종속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연극학자 유민영(柳敏榮) 단국대명예교수가 지은 ‘이해랑탄생100주년기념평전-한국연극의 巨人 이해랑’에서 내용과 관련사진을 발췌, 재구성하여 연재한다.<편집자 주>
이해랑의 전주 이씨 종묘제례식 참여.
해량(海良) 이해랑은 연극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이 왕가(李 王家)의 후 손이다. 그는 능원대군(綾原大君)의 11대손이다. 능원대군은 원종대왕(元宗 大王)의 둘째아들로서 바로 이조(仁祖)의 계씨이다.

능원대군은 선조 31년(1598) 4월에 성천에서 출생하여 효종(孝宗) 7년(1656)에 5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충신열사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또한 19세기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 이세보(李世輔, 1832~1895년)가 이해랑의 작은 증조부다.

1937년 1월 29일 이해랑의 조부 생신 때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검은 두루마기 입으신 분이 이해랑의 조부 이재영(李載榮), 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 양복 입으신 분이 이해랑의 부친,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해랑.
해랑의 부친 이근용(李瑾鎔)은 1895년에 종로구 와룡동 비원 바로 앞 동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가 (班家)에다가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한 명민한 소년으로서 당시 사학 명문인 휘문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역시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모교에서 잠시 생물 교사를 했다.

워낙 두뇌가 명석하고 학구적이어서 20대 초반의 젊은 교사지만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히 좋았다. 이때 애제자로는 뒷날 백재무로 통한 백두진(白斗鎭) 총리, 선구적 소설가 월탄 박종화(朴種和), 신무용의 개척자 조택원 (趙澤元) 등이 있다.

그는 이 시기에 부모의 권유에 따라 명문가 규수 홍씨(洪氏)와 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는 1년 뒤인 1916년에 아들 해량 (海良)을 낳았다. 매우 다복한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런데 홍씨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제대로 산후조리를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잔병치레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산후 3년째 되던 해인 1919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전표지. 유민영 지음, 768쪽, 태학사, 2016.
근용의 첫 번째 시련이었다. 상처한 근용은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외아들 해량은 할머니와 유모가 키웠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젊은 날에 닥친 상처는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는 교편생활도 너무 단조롭고, 상처까지 한 처지여서 뭔가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당초 그는 신약한 모친을 일찍 여읜 터라서 의사를 지망했고 마침 부친도 권유해서 동경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제대로 의사가 되려면 선진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3·1 운동 직전에 그 어려운 교도제국대학 의학부에 당당히 합격한다. 거기서 그는 불행한 가정의 고통을 잊기라도 하듯 치열하게 공부했다.

워낙 명석 하고 끈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외과를 전공하고 학위를 받자마자 곧바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젊은 외과부장이 되었다. 한편 그와 두뇌 경쟁을 했던 실제(實弟) 성용은 근용이 교도제국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둘째 성용이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정리=권동철]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