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950년대초 ‘국수는 귀한 음식’…수입밀 ‘한반도 국수 역사’ 바꿔

태양건조 방식으로 국수를 말리는 '백양국수'
세종4년(1422년) 5월, 상왕上王 태종이 돌아가셨다. 그해 5월17일(음력)의 기록에 ‘태상왕수륙재’에 관한 내용이 있다. 세종에게 태종은 아버지이자 스승, 멘토였다. 왕좌를 물려주었다. ‘험한 일’은 자신이 맡았다. 아들 세종이 ‘성군’이 되길 기원했다.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4∼5년 동안 외교, 국방 등 험한 일은 자신이 도맡았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제사다. 중요한 제사상이다. 음식 이야기도 나온다.

“(전략)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麵),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라는 내용이다.

‘대언’은 승지 혹은 도승지다. 왕명을 전하는 공식비서(비서실장)다. ‘속고치’는 몽골식 벼슬로 왕의 개인적인 비서쯤 된다. 태종의 수륙재에서 국왕의 공, 사적 비서에게만 반상(밥상)을 허용하라는 뜻이다. 음식은 불과 다섯 종류이다. 5기(器) 밥상이다. 국왕과 불상, 승려 이외에는 만두, 국수, 떡을 내놓지 말라고 했다.

국수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가난한 시절이긴 했다. 개국 30년, 나라는 섰으나 국가 운영의 세부지침들도 마련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은 한참 후에 나온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국수는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참 귀한 음식이었다. 국수를 하찮게 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깊은 오해다. 흔히 “언제 결혼하느냐?”는 질문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로 묻는다. 국수 가락이 길고 곧 장수를 뜻하니 결혼식에 국수를 대접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국수=장수’라면 돌날, 환갑날에 사용해야 한다. 왜 느닷없이 결혼식인가? 국수가 장수를 뜻한다면 경북 안동의 국수제사는 설명이 힘들다.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장수하시라고 국수 제사를 모신다? 뭔가 어색하다.

건진국시
인간은 누구나 평생을 살아가면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겪는다. 어른이 되고(관), 결혼한다. 죽고 제사를 모신다. 중요한 일인 관혼상제에는 귀한 음식을 내놓는다. 상에도 차리고 손님맞이에도 필요하다.

국수에 대한 이해는 ‘국수는 굉장히 귀한 음식’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귀한 국수는 반가(班家)의 음식이었다. 귀한 음식이니만큼 반가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주요한 도구였다. 반가에서는 제사나 손님맞이에 국수를 사용했다. 상민(常民)들이 만들기 힘들고 손 많이 가는 국수를 찾을 일은 없었다. 일반인들은 평생토록 국수를 보지 못하다가 결혼식 정도에만 국수를 만날 수 있었다.

장례식장 음식으로 국수 대신 육개장(해장국 혹은 갈비탕)이 정착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국수가 만들기 힘들고 일정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이미 몇 달 전에 결정된다. 국수 재료를 구하고 국수를 만들 시간이 넉넉하다. 결혼식 때 국수를 먹을 수 있는 이유다.

초상은 예고 없이 닥친다. 국수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언제쯤 돌아가실는지 짐작하기 힘들다. 짐작하더라도 살아계신 어른을 눕혀놓고 초상 준비를 할 수는 없다. 초상은 늘 급작스럽게 닥친다. 초상 당일 천막을 치고 나면 바로 조문객들이 들이닥친다. 당장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육개장이 국수보다는 한결 편하다. 육개장 역시 별다른 반찬이 필요치 않다. 그릇도 많이 필요치 않다. 국밥 스타일로 내놓으면 아주 편리한 음식이다. 쇠고기로 만든 육개장을 먹기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개장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초상집 개장국’이 흔했다.

'경당종택'의 종부 권순 씨가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있다.
국수를 오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수재료 구하기와 만들기가 예전에 비해서 너무 편해졌기 때문이다. 밀가루가 가지고 있는 글루텐 성분이 국수의 모양을 잡는다. 글루텐이 적거나 없는 쌀이나 메밀, 콩 종류로 국수를 만들기는 힘들다. 우리는 쌀밥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한반도는 밀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나마 얼마간 생산되는 밀은 대부분 누룩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술은 많은 곡물을 필요로 한다. 술을 만들기 위해서 누룩이 필요하고, 누룩은 밀로 만들었다. 곡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정부는 술, 누룩의 생산을 막았다. 당연히 밀 생산도 억제했다. 그나마 생산되는 한반도의 밀도 국수를 만들기에는 좋지 않았다. 수요는 있으나 공급이 없다. 결국 밀을 수입한다. 고려시대에 이미 중국 화북지방의 밀을 들여왔다.

'경당고택'의 하늘하늘한 '국시'
곡물로 국수를 만들려면 고운 가루를 만드는 기계가 필요하고 기계를 움직일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 기계가 없으면 결국 물레방아, 절구, 디딜방아 등을 사용해야 한다. 곱게 간 다음 체로 쳤다. 이런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얻는 것은 힘들다. 국수를 만들 고운 가루를 구하기 힘드니 국수가 귀한 음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단 한반도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파스타의 종주국인 이탈리아도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고운 가루를 얻는 제분기계가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파스타는 만나기 힘든 음식이었다. 제분기 사용 전에는 이탈리아 역시 손으로 빚는 수제비 정도의 음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나마 국수를 만들기 쉬운 밀을 주식으로 사용했으니 국수 비슷한 음식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밀이 주식도 아니고 또한 구하기 힘든 한반도에서 글루텐 성분이 적은 메밀 등으로 국수를 만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꾸역꾸역 국수를 만들었다. 메밀로 만든 냉면이 한반도에 살아남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다.

내리는 장면
우리 모두가 즐겨먹는 국수 3종류

국수는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칼이나 작두 등 도구로 자른 것이다. 반죽을 한 다음 도구로 자른다. 우리나라 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밀이 아닌 곡물로는 만들기 힘들다.

칼국수
두 번째는 좁은 구멍으로 압착해서 뽑아내는 것이다. 냉면이나 가 대표적이다. 밀이 아닌 곡물로도 가능하다. 의 ‘막’은 시간상으로 막 내려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냉면 역시 막 내려서 먹는다. 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를 굳이 냉면과 달리 ‘막’국수라고 부르는 것은 ‘막’이 ‘거칠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껍질도 채 까지 않고 험하게 부숴서 마구 내려 먹는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녹말(전분)을 이용한 국수를 압착해서 뽑기도 했다. 압면(壓麵) 혹은 착면(搾麵)이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는 압면 국수가 나온다. 여름철에 시원하게 먹는 국수다. 녹말로 만들었다. 역시 밀은 아니다. 화채에 녹말국수를 넣은 정도의 음식이다.

막국수
나머지 하나는 손으로 만드는 수제비나 수타면 등이다.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사람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수를 착면(搾麵), 삭면(削麵), 납면(拉麵) 등으로 구분한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납면이다. 납면(拉麵)의 중국 발음이 ‘라미엔’이고 일본에서는 ‘라면’으로 불렀다. 우리는 인스턴트 라면을 라면으로 부르지만 라면을 처음 만든 중국에서는 국수 그중에서도 수타국수를 ‘납면=라미엔’으로 부른다. 일본도 당연히 손으로 당겨서 만드는 국수를 라면이라 부르고 우리의 라면은 반드시 유탕라면(油湯拉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수타짜장면이라고 부르는 국수가 바로 라면이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라면을 방편면(方便麵)이라고 부른다. 편리한 라면, 바로 인스턴트 라면이라는 뜻이다.

안동 '지례예술촌' 종부 이순희 씨가 멧국시를 만지고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나 지금은 가장 흔한 음식이 되었다. 국수가 갑자기 흔한 음식이 된 것은 195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진행되었던 미공법 480조, 즉 PL 480조와 관련이 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무제한 공급되었다. 기아선상의 한반도에 미국은 자국의 잉여농산물 밀을 무제한 공급했다. 밀 가격의 90%는 한국정부가 관리토록 하고 10%를 미국에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10%의 밀 대금으로 미국산 방위 무기를 구입, 다시 한국정부에 넘겼다.

1960년대 언저리 영세규모의 국수집, 제면소가 급격히 생긴 것도 미국 산 밀가루가 흔해졌기 때문이다. 곡물은 여전히 부족했다. 막 보릿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최대 목표는 ‘식량자급자족’이었다. 부족한 쌀 대신 밀가루 음식, 분식을 장려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제면소가 세워졌다. 밥, 국수, 수제비를 동시에 먹었다. 혼식, 분식은 이 시대의 키워드다. <음식디미방>에서 ‘진가루=진짜 가루’라고 불렀던 밀가루가 지천으로 흔해졌다. 전국에 가 흔해졌고 일본에서 기술 전수 받은 라면도 시작되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 아니었다. 쌀 대신에 먹는 천대받는 음식이 되었다. 메밀 대신 밀. 한반도 국수 역사의 키워드는 단순하다. 메밀만 사용하다가 한결 편리한 밀이 등장했다. 우리 밀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 밀 살리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메밀 대신 밀이 국수를 대신했다. 국수는 미국 산, 수입산 밀로 만든다. 한반도 국수 역사의 시작이고 끝이다.

국수 맛집 4곳

골목안손국수

안동 시내 구 시가지에 있다. ‘홈플러스’ 건너편 골목 안. 와 제물국시를 모두 내놓는다. 밑반찬들도 좋다. ‘부들부들한’ 원형 ‘국시’를 만날 수 있다.

봉화묵집

손 반죽과 기계 반죽을 곁들인 전형적인 ‘안동국시’ 스타일이다. 서울 성북 아리랑고개 부근에 있다. 업력이 길고 시어머니-며느리로 2대 전승 중이다. 김치도 압권이다.

안동국시

서울 압구정동에 있다. 오래된 안동국시 전문점. 문어초회와 수육 등도 수준급이다. , 제물국시 모두 가능하다. 우리밀국수도 있다. 부추김치도 좋다.

행운집

전북 임실 강진면 버스터미널 부근이다. 작고 허름한 가게지만 국수가 일품이다. 임실의 태양건조국수인 ‘백양국수’를 사용한다. 돼지고기 수육, 겉절이 등도 아주 좋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