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는 솜털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배우로서 존재감은 묵직했다. 최근 호평이 쏟아지는 영화 ‘미쓰백’(감독 이지원, 제작 영화사 배) 개봉 직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한지민은 하늘 거리는 화사한 미모와 달리 눈빛부터 행동까지 진중함이 가득했다. 배우 인생에서 한 단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정과 진정성을 인터뷰 내내 엿볼 수 있었다.

한지민의 파격변신으로 화제를 모으는 영화 ‘미쓰백’은 자신을 지키려다 전과자가 된 ‘미쓰백’ 백상아(한지민)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지은(김시아)를 우연히 만난 후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참혹한 세상과 맞서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한지민은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세상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백상아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펼친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가득한 한지민에게 입에 거친 욕을 달고 살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 듯한 백상아는 어울려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지민은 모든 우려를 떨치고 백상아 역을 완벽히 소화해내며 영화의 메시지를 가슴으로 전한다. 인터뷰 초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는 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다소 민망한지 홍조를 띤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만족감과 설렘도 언뜻 비쳐졌다.

“사실 영화 언론 시사 전날 너무 긴장돼 잠을 전혀 못 잤어요. 그런 건 처음이었어요. 이 영화는 내가 스크린에 어떻게 비쳐질까 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라는 생각에서 출연을 결정했어요. 그런데 내가 백상아에 어울리지 않아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났어요. 언론 시사 당일 인터뷰가 많아 기사들을 체크하지 못했는데 소속사 식구들이 캡처해 보내주더라고요. 처음에는 ”이게 다는 아닐 거야“라며 현실을 부정했어요. 믿어지지 않았죠. 정말 모두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한지민이 ‘미쓰백’ 백상아가 돼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의 연속이었다. 주위의 우려부터 내면에 쌓여 있는 소심함, 선입견까지 수많은 벽을 하나씩 깨가며 역할에 다가갔다. 극본까지 쓰고 연출을 맡은 이지원 감독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면서 백상아의 내면을 탐험했다.

“예전에는 나와 닮아 있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어요. 쉽고 편한 길을 찾아 다닌 거죠. 그러나 이제는 나와 다른 캐릭터를 주로 선택해요. 그래야 연기할 맛이 나거든요. 과거에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연기를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표현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백상아의 삶은 저와 교집합이 전혀 없어요. 경험이 없으니 머리로 생각하는 감정으로 백상아를 오롯이 그려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백상아의 삶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며 밑바닥부터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죠. 단순한 외모나 제스처가 아닌 백상아의 감정의 근원을 찾아가며 캐릭터에 공감하려고 노력했어요.”

한지민은 영화 속에서 아역배우 김시아와 완벽한 연기 궁합을 선보인다. 무려 600대 1의 경쟁을 뚫고 지은 역에 캐스팅된 김시아는 첫 연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선보여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한지민은 김시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순간 백상아에 빙의됐는지 실제 엄마 같은 눈빛으로 강렬한 애정을 드러냈다.

“감독님이 처음에는 시아가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나 다시 보니 눈에 수많은 감정이 서려 있어 캐스팅하셨대요. 마치 어른 한 명이 앉아 있는 것 같은 신중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세요. 사실 시아가 엄마 욕심으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야기를 나눠 보니 본인이 연기를 정말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지은이의 마음으로 일기를 쓰고 이미 지은 역할에 공감해 있었어요. 여느 아역 배우들과 달리 시아는 연기가 처음이어서 계산되지 않은 마음으로 접근하다 보니 지은 역할을 더 잘 표현한 것 같아요. NG가 거의 없었어요. 시아가 감정으로 제 가슴을 때려주니 그걸 잘 받아서 표현하면 제가 백상아가 될 수 있었어요.”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영화 ‘미쓰백’은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우리사회 이면들이 날 것 그대로 표현된다. 그런 점이 한지민이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다. 영화란 매체의 파급력을 노린 것이다.

“불편한 소재의 영화를 볼 때 어떤 기분인지 저도 잘 알아요. 뉴스로 봐도 괴로운데 영화를 보면 더 괴로울 수 있어요. 하지만 아동학대는 지금 어디선가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뉴스로 보면 10분만 지나면 잊히기 마련인데 영화로 보면 그 깊이가 더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우리 영화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03년 드라마 ‘올인’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배우로 데뷔한 지 이제 16년. 정말 우연히 배우로 데뷔한 한지민은 배우가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다. 자신이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게 마냥 신기했던 그는 이제 연기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

“운이 정말 좋았어요. 운 좋게 작품을 하면서 계속 혼이 나다 보니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늘 비슷하게 연기하는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조선명탐정’을 만났어요. 이제까지 해온 것과 전혀 다른 캐릭터였는데 그걸 만들어나가는 게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 희열을 계속 느끼고 싶어요. 예전에 전 우물 안에 살았던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 난 뭘 했지’라고 떠올려 보면 별다른 추억이 없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거 다하려고 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 제공=리틀빅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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