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지평면의 구둔역은 ‘80’을 목전에 둔 역이다. 주름 깊은 은행나무 한 그루, 엔진 식어버린 기관차와 객차 한 량, 역 앞을 서성이는 개 한 마리가 구둔역의 친구다. 구둔역은 간이역이었던 흔적을 뒤로한 채 폐역이라는 명패를 달고 가을 벌판을 지키고 서 있다.

구둔역은 1940년 4월, 중앙선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지켜봤으며 6.25한국전쟁이라는 질곡의 세월을 버텨왔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몇 차례 스쳐 가던 간이역은 청량리~원주간 복선화 사업으로 기존 노선이 변경되면서 2012년 폐역의 수순을 밟았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이 담긴 촬영지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구둔역이 있는 구둔마을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양으로 넘어서는 언덕길에 임진왜란때 아홉개의 진지가 있어 ‘구둔(九屯)’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전란때마다 구둔역은 격전의 현장이었으며 6.25한국전쟁 당시 마을이 폐허가 됐을 때도 구둔역만은 허물지 않고 남았다고 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

목조양식의 구둔역은 2006년 등록문화재(296호)로 지정됐다. 역사와 광장, 철로, 승강장이 포함됐다. 삐걱거리는 대합실 문을 열고 들어서 승강장에 서성거리다 철로 위를 걷는 행위 모두가 근대문화를 더듬는 행위와 연결된다. 대합실에는 열차가 오가던 시절의 시간표와 매표소 유리창 등이 빛바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과거를 뒤로 한 구둔역은 이제 사랑이 녹아든 역이다. 구둔역이 화려한 조명을 받은 것은 영화 ‘건축학개론’ 덕분이다. 국민 여동생인 수지의 극중 첫사랑 장면이 담긴 역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구둔역 승강장에 나서면 청량리행을 알리는 이정표가 햇살을 머금고 철로 변을 지키고 서 있다. 멈춰 선 옛 기관차와 객차 역시 철로 한 편에 덩그러니 세워져 폐역의 아련한 정취를 더한다.

고백의 정원 품은 등록문화재

열차 엔진은 식었지만 구둔역은 새 여정을 시작한다. 역사 옆에는 빨간 벽돌과 나무 한그루가 어우러진 ‘고백의 정원’을 조성해 연인들의 사랑고백 장소를 마련했다. 기차표를 팔던 공간은 아담한 카페로 변신했고, 군불을 쬐며 추위를 다스릴 모닥불터도 마련할 계획이다.

양평 장날이면 북적거리던 구둔역 일대는 이제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으로 남았다. 주말이면 번잡해지는 용문산 관광지와는 달리 용문을 거쳐 구둔까지 들어서는 길목은 저수지와 고갯마루의 한적한 도로가 이어진다. 열차로는 구둔역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일신역에서 내려 걸어서 15분 거리다.

구둔역에서 벗어나 용문방향으로 방향을 잡으면 용문산 관광지다. 천년사찰인 용문사까지는 계곡따라 이어지는 산책코스가 좋으며 주말에는 산행객이 뒤엉켜 다소 붐비는 편이다. 용문사 경내의 은행나무는 국내 최대로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돼 있다.

글ㆍ사진=서 진(여행칼럼니스트)

여행메모

▲가는길=6번국도 양평읍, 용문읍을 거쳐 지평방면 345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청량리역~일신역간 무궁화호가 운행중이다, 약 50분 소요.

▲음식=양평 들꽃수목원 건너편의 옥천냉면은 평양 냉면 족보에 이름을 올린 맛집중 한 곳으로 북한식 담백한 국물에 텁텁한 면발이 특색 있다. 용문산 초입에는 들깨, 곤드레 등 힐링 푸드를 테마로 한 식당들이 여럿 있다.

▲숙소=중미산 자연휴양림 등 숲속에서 하룻밤 묵는 것을 추천한다. 중미산 휴양림은 토왕성, 목성 등 행성을 테마로 한 숙소들이 이색적이다. 휴양림 옆에는 중미산 천문대가 들어서 있어 밤하늘의 별자리와 추억을 나눌 수 있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