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코드 지정, 국내 도입 두고 공방 / 게임업계 “결사반대, 총력저지”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기로 최종 의결했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구분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 등 70여 개의 안건이 통과되면서 게임산업계의 반발도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문체부도 게임중독을 질병 지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게임중독 질병’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보건복지부와의 협의체 구성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이번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은 1990년 이후 30년 만에 개정됐다. WHO(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한 194개 회원국은 이 기준에 따라 2022년부터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해 관리해야 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게임중독이란 ‘게임 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런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는 상황이 12개월 이상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번 분류기준 변경엔 음란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도 질병으로 분류됐다.

국내 최대의 게임전시회 지스타(G-STAR)에서 관람객들이 PC게임을 즐기고 있다. 연합

‘게임중독 질병’ 두고 부처 간 엇박자

지난달 28일 정부는 WHO의 게임이용 장애(Gaming Disorder) 질병코드와 관련해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와 관계자들이 참석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와 관련한 국내 도입 문제 등을 논의하며 충분한 준비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분류된 만큼 국내 도입 시기와 방법 등과 관련해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모으기로 했다.

이를 위해 민관협의체도 구성해 향후 일정을 구체적으로 대응해 나갈 예정이다. 여기엔 국무조정실이 중심이 돼 복지부와 문화부 등 관계부처, 의료계, 시민단체, 게임업계 등이 참여한다. 이날 이낙연 국무총리는 총리실 간부회의에서 게임중독 질병코드 부여와 관련해 “국내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라며 “관계부처들은 향후 대응을 놓고 조정되지도 않은 의견을 말해 국민과 업계에 불안을 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총리의 이같은 발언은 문체부와 보건복지부가 WTO 결정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며 엇박자를 내는 것에 대한 경고다. 게임중독이 공식 질병화되면서 복지부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관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으나, 문체부는 보간당국 주도의 민관협의체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게임중독 질병 지정 문제를 두고 부처 간 갈등이 불거지는 모양새다. 문체부는 게임 산업의 주무부처다.

이번 개정안은 즉각 시행되지 않는 만큼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개정안은 2022년 1월부터 각국에 권고적 효력을 행사하지만, 각국은 국내 절차를 거쳐 도입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WHO의 권고안을 국내에 도입하기로 결정해도 2026년이 돼야 본격적인 게임중독의 질병관리가 가능하다. 이 총리는 “우리는 몇 년에 걸쳐 각계가 참여하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건전한 게임이용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게임산업을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해결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임업계 반발 시작

정부는 게임업계와 보건의료계, 법조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 협의체를 통해 합리적인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엇박자, 게임산업계의 반발 등으로 처음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정부는 준비 기간 동안 게임산업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시행방안을 세울 예정이지만 수월하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국내 게임업계와 학회는 이번 WHO의 결정에 반발해 ‘게임문화·산업 장례식’을 치르며 공식적인 반대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법적대응’ 카드까지 꺼내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정부의 질병분류기준 도입을 극도로 꺼리는 모양새다.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지난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발대식을 갖고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공대위는 게임중독 질병코드를 주도하는 의료계를 향해 “‘게임은 마약’이라고 게임업계를 공격하던 논리에서 변화해 ‘게임이용자 중 아주 소수이지만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우리가 도움을 줘야한다’고 우회했지만 그들의 결론이 변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게임뿐만 아니라 인터넷, 유튜브, 영화, 만화 등에도 중독이라는 굴레를 씌우려 한다는 것이 공대위의 입장이다.

공대위원장을 맡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대위에서 많은 고민과 토론을 하면서 ‘도대체 게임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며 “젊은이들의 문화이고 미래의 산업이자 4차산업혁명의 꽃, 한류의 원조인 게임이 과거에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자괴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공대위는 ‘게임문화와 게임산업에 대한 장례를 치르는 장례행사’도 치르며 게임업계의 게임중독 질병 등록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난달 2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

게임업계 “가정 내 갈등 우려”

공대위에 소속된 한국모바일게임협회는 이번 WHO의 결정이 부모와 자녀 간 갈등이 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국모바일게임협회 측은 “WHO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한국 사회에서 게임을 조금 많이 하면 이를 질병으로 취급할 여지가 크다”며 “사실상 게임장애를 정신병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게임산업의 위축에 따른 산업적 파장과 더불어 사회적 파장도 커질 것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SNS에선 게임업계 종사자들이 해시태그를 붙이며 ‘게임은 문화입니다, 질병이 아닙니다’ 등의 문구를 붙이는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다. 게임업계는 치밀하게 준비하며 하나의 목소리를 낼 것 예고하고 있다. 공대위 활동에 참가한 단체들도 게임업계의 하나된 주장을 펼칠 좋은 기회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WHO의 결정이 번복될 수 있도록 힘을 합치고 국내 도입을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한국게임학회, 한국게임산업협회 등 89개 유관 단체는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정부가 사회적 합의 없이 관련 내용을 한국표준질병분류(KCD)에 적용할 경우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며 강력 대응을 예고했다. 이들의 대응 계획도 구체화되고 있다. 게임업계는 게임 질병코드에 대항할 파워블로거(게임스파르타) 300인을 조직하고 온·오프라인에서의 범국민 게임 촛불 운동을 벌일 계획 등 향후 추진 방향을 공개하기도 했다.

‘교육적 낙인효과’라는 지적도

지난달 28일 국회에선 김성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따른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분류돼 국가적인 관리가 시작되기 전에 이를 적절히 적용하기 위한 면밀한 검토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여기에 참석한 강격석 한국콘텐츠진흥원 게임본부장은 “게임이용장애가 질병코드에 도입된다면 가장 큰 문제는 교육적인 낙인효과”라고 말했다.

강 본부장은 통계를 근거로 게임 과몰입의 질병화는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4년부터 5년간 2000명을 대상으로 게임이용자 패널연구를 한 결과 5년동안 과몰입군을 유지한 청소년은 1.4%에 불과했다”며 “게임 과몰입에 빠졌다가도 되돌아오기 ㄸㅒ문에 이를 질병으로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콘텐츠진흥원은 게임 과몰입 예방 활동과 상담 치료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국내 게임업체들의 모임인 한국게임산업협회도 WHO의 결정안의 국내 도입을 막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최승우 한국게임산업협회 정책국장은 “WHO 총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더라도 WHO FIC(보건의료분야 표준화 협력센터)를 통해 이의를 제기하면 수정이나 개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WHO에 지속적인 반대 의사를 전하고, 관계부처엔 ‘한국표준질병·사인 분류체계’에 반영되지 않도록 입장을 전한다는 계획이다.

임상혁 한국게임법과정책학회장은 “게임을 질병의 하나로 규정하고 국가 치료대상으로 삼는 것은 헌법상 개인행동의 자유와 기업활동의 자유, 명확성의 원칙이나 비례의 원칙 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게임 개발자들도 같은 입장이다. 한국인디게임협회, 넥슨 노동조합,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등이 포함된 한국게임개발자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게임은 전체 국민의 70%가 이용하는 건전한 대중 문화이자 놀이문화”라며 “게임을 행할 자유를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제한을 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게임산업 전체와 게임중독은 분리해야”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WHO가 다수결의 원칙이 아닌 과학적 근거로 입증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며 “게임에 과몰입하고 중독상태가 되면 뇌기능에 문제가 생긴다는 입증을 통해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분류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뜻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게임이 적당히 통제되는 경우엔 질병으로 보진 않지만 과도하게 몰입할 때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기에 WHO의 경고에 일정부분 동의한다”고 말했다.

게임업계의 반발이 심하지만 게임중독의 질병코드의 국내 도입도입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이 교수는 “국제기구에 가입한 나라로서 질병분류에 따른 변화된 절차를 밟아 나갈 것”이라며 “WHO의 과학적 근거를 뒤집을 만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면 거스르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 교수는 게임산업 전체와 게임중독을 명확히 구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4차산업과 관련해 신산업 동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기에 게임산업 전체의 이미지를 좋지 않게 하거나 방해하는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진 않는다”며 “게임산업이 갖는 긍정적 요소와 게임중독의 부정적 요소를 구분해 관리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게임산업 전체가 위축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지만,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최 교수는 “게임산업계도 중독 방지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자체적인 노력을 할테고, 정부가 알코올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 듯이 게임도 마찬가지로 본다”며 “이런 정부차원의 관리가 체계화되면 게임 중독이 아니면 게임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이미지도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임중독의 질병화를 과도하게 이슈화하는 것이 오히려 게임산업 전체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미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25일 WHO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72차 WHO 총회 B위원회에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에 따라 194개 WHO 회원국에선 2022년부터 이 기준이 발효된다. 국내 도입 시기는 ‘한국표준질병·사인 분류체계’가 5년 주기로 개정되는 점을 비춰보면 2025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천현빈 기자



천현빈 기자 dynami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