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화되는 한·일 ‘경제전쟁’ 2R
  • 日 “추가보복” 예고, 韓 “GSOMIA 재검토” 맞불 / 美도 안보갈등으로 확대 우려 ‘관여’ 입장 선회
  • | 2019-07-20 08:15:11
청와대와 여야 5당 대표들이 지난 18일 이례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1년 4개월여 만의 일이다. 이 자리 참석자들은 일본의 규제 조치의 부당성에 대해 공감했다. 미국도 한일 간 무역갈등이 안보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며 ‘관여(engage)’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본은 이르면 7월 말에서 8월 초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대상국 배제 여부를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한일 정보보호협정 재검토 카드를 언급하며 일본의 공세에 맞불을 놓는 모양새다. 한일간 무역분쟁이 2라운드에 접어드는 양상이다.

美 “관련된 이슈에 관여할 것”

한일 무역 갈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동안 방관하는 자세였던 미국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방한한 데이비드 스틸웰 신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만난 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친구이자 동맹”이라며 “양국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한일 양국과 맺은 강한 동맹관계와 군사정보협정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서 스틸웰 차관보는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을 접견한 뒤에도 “우리는 동맹이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이 관련된 모든 이슈에 관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쓰인 관여라는 단어는 ’engage’로 ‘정치 문제에 적극 관여하는’이라는 뜻이다. 한일 갈등에 침묵하던 미국이 보다 적극적인 중재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스틸웰 차관보는 한일 양국이 민감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다. 이에 김 차장은 “(미국에) 우리 입장을 자세히 설명했고 스틸웰 차관보가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했다.

스틸웰 차관보의 “한일 갈등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발언에서 미국 정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에겐 한일 양국이 모두 중요한 동맹국으로 일방적인 한쪽 편을 들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가 이번 갈등은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원론적 입장을 낸 까닭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한일 무역 갈등에 공개적인 의사를 내면서 한일 무역 갈등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 정부도 이런 외교적 상황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의용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재검토”

우리 정부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재검토 카드를 꺼내며 미국에 적극 개입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 18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5당 대표 회동에서 지소미아를 언급하며 “지금은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으나 상황에 따라 재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대상국에서 배제하는 상황에 대비해 지소미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그동안 청와대는 지소미아가 정세 변화에 따라 ‘검토해 볼 만한’ 외교카드로 여겨왔다. 미일 간 안보 협력의 필요성에 따라 체결된 지소미아 재검토는 효과적인 대일, 대미 카드가 될 수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지소미아 재검토 카드는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실제 미국은 경제 갈등이 한일 간 외교안보 갈등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주 방한한 미국 외교부 대표단에 미 정부 인사들은 지소미아가 파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분야의 갈등이 안보 분야로 번지면 한미일 군사공조 체제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그 배경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안보 철회 카드가 현실화되면 미국의 반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될 위험도 있다.

美 전문가들 “일본에 역풍을 초래할 뿐”

미국의 전 고위급 관료와 전문가들도 한일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미 국무부 외교관 출신의 미치슬라브 보두진스키 포모나 칼리지 교수는 로욜라 매리마운트대 국제관계 및 일본 정치전문가인 진 박 교수와의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공동기고문을 냈다. 기고문에서 그들은 “무역 외 다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경제 전술을 동원한 것은 역풍을 초래할 뿐이며,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 같은 사람들이 쓸 법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두 전문가는 아베 총리의 이런 무역 규제가 이미 국제 무역사회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며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도 위반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 두 전문가는 “아베 정부가 그동안 일본이 쌓아온 신뢰도를 손상하고 자체 외교를 저해하는 한편, 이미 약화한 글로벌 무역시스템을 더욱 약화하는 선례를 제공해 자책골을 먹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다”고 덧붙였다. 무역 규제는 일본의 국익 측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글로벌 무역시스템을 해친다는 뜻이다. 이들은 경제의 개방성을 강조한 G20 회의 직후에 무역 규제가 시행된 것에도 유감을 표했다. 이어 한국에도 민족주의를 제어하고 반일 카드가 증폭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 지난 19일 일본 정부가 자국이 한국에 제안한 '제3국 중재위원회'의 설치 시한(18일)까지 한국이 답변을 하지 않았다며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오른쪽)가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
日의 캐치올 트집도 ‘생떼’

지난 12일부터 불거진 한일 양국의 대북제재 위반 여부 공방도 가열되고 있다. 일본이 무역 규제 조치 이유에 대해 ‘한국의 대북제재 위반과 전략물자 밀반출 가능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해 청와대는 “우리 정부는 상호 불필요한 논쟁을 중단하고 일본 정부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문가 패널 또는 적절한 국제기구에 한일 양국의 4대 국제수출통제체제 위반 사례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의뢰할 것을 제의한다”고 대응했다. 이어 “우리 정부의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 대한 사과는 물론 보복적 성격의 수출규제 조치도 즉각 철회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도쿄에서 열린 한일 양국 간 실무협의에서 일본의 수출통제 조치의 근거로 제시했던 ‘부적절한 사안’에 대해서 말을 바꿨다. 일본 측은 “북한 등 제3국 반출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며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또한 3차 보복조치로 예고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도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캐치올(상황허가)’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진 않다. 캐치올이란 무기전용가능성이 있는 전략물자 수출을 통제하는 제도다. 하지만 캐치올 관련 통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특정 국가 품목 통제나 중점감시품목 운용 등을 비롯해 전반적인 규정이 훨씬 깐깐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은 지난 19일 남관표 주일대사를 초치해 강제징용 배상판결 중재위원회 개최 절차에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일본은 앞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을 준비하며 한국에 중재위 설치와 관련한 시정 조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노다로 일본 외무상은 항의 과정에서 남 대사의 말을 끊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외교적 무례’를 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갈등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현종 “국제법 위반은 일본”

일본의 주일대사 초치와 관련해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19일 브리핑에서 “일본은 일방적인 수출규제 조치를 취했고 이는 세계무역기구(WTO) 원칙과 G20 오사카 정상회의에서 발언한 자유무역 원칙, 나아가 글로벌 밸류체인도 심각하게 훼손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오히려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 주체는 일본”이라며 “더욱이 근본적으로 지적할 점은 당초 강제징용이라는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통해 국제법을 위반한 것은 바로 일본”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부당한 수출 규제 조치 철회와 상황을 악화시키는 발언과 조치를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에서 데이비드 스틸웰 신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접견하고 있다. 연합
전경련, 日 경제산업성에 “규제 철회해 달라”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방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 15일 전경련은 일본의 무역 규제와 관련해 일본 경제산업성에 정책건의서를 전달했다. 전경련은 건의서에 ‘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와 수출 심사 우대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를 철회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전경련은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은 ‘일본(소재 수출) - 한국(부품 생산) - 미국·중국·유럽(제품화)’의 가치사슬을 갖고 있다”며 “이번 일본의 조치로 글로벌 ICT 기업들에 악영향이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경련은 일본의 무역 규제 조치가 국제 무역사슬의 교란은 물론 일본 기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 일본의 대외 이미지와 신뢰도 하락, 정경 분리 기조 약화, 동아시아 안보 공조 체제 불안 등을 들며 일본이 즉각 수출 규제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일 새벽 일본대사관이 위치한 건물 앞에서 70대 노인 A씨가 자신이 탑승한 차량에 불을 붙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족에 따르면 사망한 A씨의 장인이 강제징용 피해자라는 진술이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에 따르면 “지인에게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한다는 식의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밝혀졌다.

‘죽창가, 국채보상운동, 의병, 열두 척의 배...’

한일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은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13일 자신의 SNS에 ‘죽창가’를 공유하며 논란이 됐다. 죽창가는 고 김남주 시인의 작품으로 SBS 드라마 ‘녹두꽃’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녹두꽃과 죽창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에 맞선 의병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일 무역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이 국민들에게 ‘죽창가’를 공유하는 것은 적절치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14일 바른미래당은 이와 관련한 논평에서 “조 수석이 국민에게 일본을 향한 죽창이 되자고 선동하고 있다”며 “어떻게든 스스로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뒷짐 지고 국민을 향해 선동질을 하고 있을 때인지 참으로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의 ‘국채보상운동’ 발언도 논란이다. 대일 외교전의 전면에 있는 김 차장은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똘똘 뭉쳐 상황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당 의원인 최재성 일본 경제 보복 대응 특위위원장도 “이 정도 경제침략 상황이면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이라고 말해 정치권의 감정적 대응이 과열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전국경제투어 일정에서 전남 무안을 찾아 “전남 주민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일련의 발언들은 모두 일제에 맞서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권까지도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모양새다.

이낙연 총리 ‘對日 역할론’ 급부상

문재인 대통령은 투톱외교를 부각하며 이낙연 총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는 해외 4개국을 순방 중인 이 총리를 두고 “총리의 순방외교를 투톱외교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봐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문 대통령이 대일 총리 외교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갖은 예상이 나오는 상황이다. 대일특사와 관련해 청와대는 ‘아직 논의할 때가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한일 무역 갈등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 총리의 ‘대일 특사’ 시나리오도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이 총리는 기자 시절 일본 특파원을 지낸 바 있고 국회에서는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을 지낸 경력이 있다.

여권에서는 ‘청와대가 적절한 타이밍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대일 특사와 관련해) 사태 장기화나 추가 보복 확산을 염두에 두고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하나의 안으로서 검토될 수 있겠으나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히며 아직까지는 ‘대일특사 카드’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한일 무역 갈등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총리의 역할론이 강조되고 있고 정치권도 초당적인 대응을 위해 입을 모으고 있다. 대일 특사를 비롯한 본격적인 외교적 해법이 조만간 본격화될 것으로 읽히는 배경이다.

천현빈 기자 dynamic@hankooki.com

<박스> 삼성·하이닉스 국산화 부품 테스트 착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산 외의 고순소 불화수소를 본격 테스트하며 품질 성능 확인에 들어갔다. 일본의 무역규제 조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국산화, 수입다변화 등의 조치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지난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소재 국산화 및 수입선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규제 이후 소재의 국산화 비율을 늘리며 샘플을 테스트하는 단계에 착수했다. 일본산 외의 고순도 불화수소 적용 테스트가 검증되려면 수개월이 걸리지만 최대한 확보한 초도물량으로 최대 1분기는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내다봤다. 이 기간 동안 국산화 테스트를 진행하며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초기의 일정 수준 이상의 수율 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지만 해외 수입처를 다변화하는 등 반도체 업계의 적극적인 대응이 본격화되고 있다.

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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