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가 있는 맛집] 호텔 한식이 돌아왔다
  • 탁 트인 도심 속 풍경을 바라보며... 가을 산천의 풍류를 맛보고 싶다
  • | 2019-10-08 14:01:03
  • 반얀트리 ‘페스타 바이 민구’
한때 호텔은 가장 고급스러운 식사 공간으로 통했다. 맛집과 노포에 밀려 잠시 잊혀졌던가. 스타 셰프와 손을 잡은 호텔 미식이 마침내 2막을 올렸다.

“이번 휴가는 멀리 안 가고 호캉스 다녀왔어.” 언제부턴가 호텔은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너머 도시생활자의 여가 공간으로 변신했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이는 카페와 비좁은 맛집 골목 사이에서 진정한 쉼을 찾을 수 없던 사람들에게 호텔은 조금 다른 시간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눈이 시원해지는 넓은 창과 탁 트인 전망이 반기고, 바닥에 닿는 폭신한 카펫을 따라 걷는 동안 차분한 향이 코끝에 와 닿는다.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는 두 팔로 다 감싸지지도 않을 커다란 화병에 담긴 꽃과 우아한 샹들리에가 분주했던 일상의 남루함을 한 순간에 밀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에 간다. 낯선 여행지에서처럼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져 인생을 뒤바꿔놓지는 않을 테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정중한 환대와 평온한 시간, 수준급의 요리와 술을 즐길 수 있다는 확실함이 주는 행복을 찾아서 말이다. 때마침 요즘 호텔들은 중식당, 일식당 일색이던 기존 식음업장을 보다 젊고 감각적인 다이닝 공간으로 재단장하고, 세계적인 감각을 갖춘 스타 셰프와 함께 한국적인 미식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미슐랭 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세 개를 획득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한식 레스토랑 두 곳 중 한 곳인 ‘라연’ 역시 서울 신라호텔 내에 자리한다. 훌륭한 식재료를 계속해서 신선하게 공수할 수 있는 안정성과 비일상적인 공간의 아름다움, 한국적인 미감을 살린 도예가의 그릇과 요리의 담음새, 호텔 특유의 격식 있는 환대와 섬세한 서비스가 모여 빚어내는 한식 파인 다이닝은 미슐랭 가이드를 통해 주목받으며 호텔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 시그니엘 ‘비채나’의 생복만두.
2017년, 처음으로 서울편을 발표한 미슐랭 가이드의 시선 또한 한식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엄격한 심사를 거쳐 레스토랑에 최대 세 개의 별점을 주는 미슐랭 가이드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올해 역시 한식 공간에 별을 부여했다. 올해 별 세 개를 받은 ‘라연’과 ‘가온’은 물론 별 두 개를 받은 다섯 곳 중 세 곳인 ‘권숙수’, ‘밍글스’, ‘정식당’, 별 하나를 받은 19곳의 레스토랑 중 7곳이 모두 한식 장르에 속해 있는 것. 그래서 흔히 중식당, 일식당, 라운지 바와 뷔페 정도의 구성으로 꾸려져 온 호텔 식음업장에 운영 대비 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로 홀대받던 한식 장르가 다시금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침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한 호텔 내 한식은 이전과 같지 않다.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려내는 것이 마땅한 한 상 차림이 아니라 음식을 즐기는 순서와 방식까지 사려 깊게 제안하는 파인 다이닝의 형식을 갖췄으며 맵고 짜고 강렬한 양념이 앞서는 조리 방식 대신 전통적인 식재료를 새로운 조리 방법으로 조명한다. ‘모던 한식’, ‘컨템포러리 한식’이라는 설명이 따라 붙는 이유다. 지난 7월, 소공동의 플라자 호텔에 모던 한식 레스토랑 ‘주옥’이 들어섰다. 2001년 한식당 ‘아사달’이 문을 닫은 지 20년만에 한식 장르의 식음업장이 등장한 것이다. 주옥은 신창호 셰프가 청담동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으로 지난해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하나를 받았다. 플라자 호텔 3층으로 자리를 옮긴 주옥에서는 한식의 굵은 뼈대가 되는 장과 식초를 주로 활용한다.

재료로는 땅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농작물과 바다의 원기를 품은 생선과 해산물, 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우, 돼지, 닭 등의 육류를 다채롭게 사용해 한국의 사계절을 요리로 표현해낸다. 특히 경상남도 진주에 계신 셰프의 장모님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들깨로 짠 들기름과 이곳만의 발효 기법으로 만든 30여 가지의 식초는 그의 요리를 ‘주옥 같은 맛’으로 만들어주는 핵심 비법. 맑고 푸른 하늘색을 일컫는 쪽빛으로 공간을 꾸몄는데 600년 고도 서울의 도심 풍경과 어우러져 입 속으로 들어오는 한식 요리의 맛까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변신을 위해 1년여 간의 공을 들인 플라자 호텔에는 주옥 외에도 미슐랭 가이드 1스타를 받은 스와니예의 이준 셰프가 선보이는 유러피언 다이닝 ‘디어 와일드’와 프렌치 요리를 하는 이영라 셰프의 샴페인 바 ‘르 카바레 씨떼’,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을 차지했던 박준우 셰프의 디저트 공간 ‘더 라운지’ 등을 함께 오픈했다. 중식 레스토랑 ‘도원’과 뷔페만 남기고 모든 공간을 새롭게 바꿨으니 거듭 방문해도 지루할 틈이 없겠다. 서울에서 가장 높고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는 시그니엘 서울은 입점한 레스토랑 두 곳이 나란히 올해의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하나씩을 받았다. 야닉 엘레노 셰프가 이끄는 프렌치 레스토랑 ‘스테이’와 광주요 그룹 가온소사이어티에서 운영하는 한식 레스토랑 ‘비채나’가 그 주인공들이다.

  • 플라자 호텔 ‘주옥’.
이 중 비채나에서는 전광식 총괄셰프가 계절마다 한 가지 지역을 선정하여 해당 지역의 식재료와 요리를 모티프로 코스 요리를 선보여 흥미롭다. 지금 방문하면 맛볼 수 있는 가을 코스의 주제는 전라도다. 산과 바다를 모두 접할 수 있는 전라도 지역의 잣, 송이, 꽃게, 갑오징어 등 다양한 재료에서 영감을 얻어 메뉴를 꾸렸다. 생가리비와 표고버섯으로 속을 채워 찜기에 쪄낸 ‘생복만두’는 백합 조개육수와 황금 팽이버섯, 송로버섯으로 만든 양념장, 감태와 잣가루를 고명으로 올려 내는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만두의 풍성한 맛이 입 안에 가을을 채운다.

조리 방법을 다양하게 변주한 요즘 한식의 경향은 ‘어국수’에서 느낄 수 있다. 갑오징어를 자르고 흰살 생선을 갈아 면을 표현한 요리다. ‘수정과’에는 감과 연시로 달걀 노른자 모양을 만든 곶감란을 더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이니만큼 음식 역시 차가운 기운에서 따뜻한 기운으로 흘러가길 바라며 차린 가을 코스라니 깊어가는 가을 산천의 풍류를 맛보고 싶다면 방문해보자. 한편, 한식 레스토랑으로 미슐랭 별을 받았던 셰프들이 호텔로 가서 창의적인 장르의 요리를 선보이는 경우도 속속 등장했다. 광화문의 포시즌스는 일식당 ‘키오쿠’가 있던 자리에 세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아키라 백 셰프의 시그너처 레스토랑 ‘아키라 백’을 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 콜로라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맛보았던 음식의 기억을 테마로 한 청담동의 한식 레스토랑 ‘도사 by 백승욱’으로 올해 미슐랭 1스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3월에는 토론토, 방콕, 하노이, 싱가포르, 뉴델리, 자카르타, 두바이 등에서 운영 중인 ‘아키라 백’을 포시즌스 서울 12층에도 오픈한 것. 세계 어느 도시에 있든 근사한 분위기를 끌어내는 모던한 스타일의 공간은 세계적인 공간 전문가 안드레 푸가 맡았다. 자연 채광이 풍성하게 드는 3층 높이의 층고와 매끄러운 목재, 붉은 단풍잎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거듭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셰프의 어머니인 백영희 작가의 것으로 숲 속의 나무, 꽃, 바위, 바람 등을 모티브로 해 부드러운 잔상을 남긴다.

요리는 한식을 가미한 모던 일식이다. 48시간동안 수비드 조리해 갈비찜처럼 부드럽게 만든 다음 겉을 바삭하게 구워 스테이크처럼 내는 ‘48아워갈비’ 같은 메뉴가 대표적이다. 우리 식의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크리스피 라이스’나 ‘AB한우타코’, ‘참치 피자’, ‘버섯 피자’ 등은 스페인의 한 입 거리 안주 요리인 타파스처럼 즐기기 좋다. 일식을 메인으로 하는 만큼 ‘연어 타다키’, ‘홋카이도 관자 키위’ 같은 신선한 해산물 요리도 여럿이니 익숙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맛의 한국, 일본식의 요리를 즐기고 싶다면 제격인 곳이다.

또 청담동에 있는 미슐랭 2스타 한식 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 역시 기존에 선보였던 요리와 전혀 다른 유러피안 다이닝을 호텔에서 선보였다. 남산에 있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에서 기존에 있던 모던 한식당 ‘페스타다이닝’을 강민구 셰프의 ‘페스타 바이 민구’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어반 그린 다이닝을 콘셉트으로 도심 속 남산의 자연 환경을 만끽할 수 있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의 장점을 살린 공간이다. 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정원, 오아시스 야외 수영장을 품은 프라이빗한 빌라에서 강민구 셰프는 기존의 한식이 아닌 유러피언 다이닝을 선보인다. ‘밍글스’를 상상하고 방문하면 전혀 다른 요리들에 놀라게 될 것. 사실 그는 미국, 스페인, 바하마 등지에서 요리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이때 맛본 음식들과 유럽의 친구들과 자주 만들어 먹었던 음식에서 영감을 받아 메뉴를 꾸렸다. ‘한우 볼로네제 파스타’, ‘양념 닭다리 숯불구이’ 같은 친숙한 요리들을 비롯해 ‘랍스터 라이스’, 베어네즈 소스와 제철 채소를 함께 내는 ‘덕자병어구이’, ‘랑구스틴을 채운 꽈리고추 튀김’ 등은 셰프의 개성이 묻어나 궁금해지는 메뉴들이다.

또 엔다이브 샐러드에는 두부와 참깨 소스를 더하고 시저 샐러드와 목살 베이컨에 유자 소스를, 한국식으로 구워낸 한우숯불구이 요리를 준비하는 식으로 한국적인 양념이나 제철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요리는 모두 섬세하고 아름다운 터치로 고급 서양 요리에 주로 사용되는 베르나르도 접시에 담겨 나와 특별함을 더한다. 느긋한 오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하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기 좋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 입맛을 잘 아는 한식 셰프의 노하우와 호텔의 특별한 서비스가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실패 없는 휴식의 시간을 얻고 싶을 때 호캉스를 가는 이들이 많지만, 이제는 이국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뜻밖의 미식을 위해 호텔에 방문해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김주혜 음식칼럼니스트 jouer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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