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푸른 파도처럼 개운한 호박식혜... 설악산 오색 단풍과 어우러진 송이 요리

다래헌의 시원한 호박식혜와 오미자차.

자꾸만 집밖을 나서고 싶게 만드는 선선한 가을 공기에 자연의 풍경도 달라져간다. 이제는 어느덧 알록달록한 단풍 옷을 꺼내 입은 가을 산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강원도는 가을 산을 보러 떠나기 좋은 곳이다. 설악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등의 이름만 들어도 그 커다란 색채가 그려지는 국립 공원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로 떠나 보려 하니 떠오르는 지명이 여럿이다. 춘천, 홍천, 횡성, 평창, 정선, 강릉, 양양, 속초, 고성까지 선택지가 많아 고민을 부른다.

홍천에는 노란 물결을 이루는 은행나무숲이 있고 속초에는 짙은 색으로 물든 설악산 국립공원이 있어 걷거나 등반하며 자연 가까이 호흡할 수 있다. 기암절벽과 어천, 독수리가 난다는 평화바위, 돌두꺼비바위처럼 신비로운 형상이 발길을 끄는 정선의 소금강계곡도 가을이면 형형색색 조화로운 모습을 이루고, 강릉으로 가면 신사임당,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이 있어 호젓한 분위기에 잠길 수도 있다. 음식에 대한 고민도 빼놓을 수 없다. 닭갈비는 역시 춘천에서 먹어야 제맛이라 생각하니 불맛을 살린 숯불 닭갈비가 아른거리고 횡성의 소고기구이나 정선 오일장의 콧등치기 국수, 감자 옹심이, 강릉의 스페셜티 커피 격전지도 들러보고 싶다. 결국 고민 끝에 먼저 향한 곳은 양양이다. 이맘때의 파도가 좋아 서퍼들이 하나 둘 모인다는 양양의 해변가가 궁금하고, 푸르른 바다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낙산사에 들러 시원한 호박 식혜를 한 잔 마셔보고 싶어서였다.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지역 3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낙산사가 있다. 관음보살이 늘 머무는 곳인 보타낙가산에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풍경, 1977년까지만 해도 동양에서 가장 컸다는 해수관음상 등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따금 나타나는 시원한 약숫물을 홀짝이며 오르다 보니 잠시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공간이 나타났다. 발을 딛고 들어서자 데워둔 온돌 바닥이 따스했는데 쟁반에 뽕나무 차와 찻잔을 담아주며 무료로 차를 마시도록 했다. 충분하면 만족하라. 벽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욕심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이 차를 마시는 시간을 느릿하게 했다. 다시 나와 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자니 수능을 앞두고 소원을 빌러 온 가족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낙산사를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소개하는 웹사이트, 블로거의 글이 많았는데 다들 마음에 소원 하나씩을 품고 오르는 중이었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크게 소실된 적이 있다. 불을 끄러 왔던 소방차에도 불이 붙을 정도로 커다란 화마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던 사건이었다.

송이버섯마을의 송이 불고기.

이후로 정성 들여 복구하였고 해풍을 맞고 자란 소나무 너머로 동해바다의 파란 물빛을 바라볼 수 있는 특유의 시원한 풍경은 여전히 이곳을 오르는 이들의 숨을 틔워준다. 끝자락에 있는 의상대는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 수행처라고 전하는데 주위 경관이 아름다운 탓도 있지만 거대했던 산불도 피해간 곳이라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이 차례로 두꺼비상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낙산사에서 내려오는 길, 마침내 야외 찻집 ‘다래헌’을 찾았다. 화재 때는 마당의 잔디만 그을었다고 하는 다래헌은 묵주나 풍경 등을 판매중인 기념품 상점을 겸한다. 실내는 분주하지만 밖으로 나서면 동해 바다를 마주한 여유로운 테라스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단호박과 조선호박을 넣어 만든다는 시원한 호박식혜 한 잔과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를 한 잔 주문했다. 단정한 그릇에 담겨 나온 호박식혜부터 맛봤다. 마치 빙수처럼 얼음가루를 떠먹는 호박식혜의 맛은 달지 않아 좋았다.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 신맛이 나서 오미자가 되었다는 오미자차는 호박식혜의 부드러운 맛을 파도처럼 개운하게 씻어주니 호박식혜를 한참 먹다 오미자차를 두어 모금 마시면 둘 다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는 이들도 서로의 시간을 해치지 않는 드문 공간이다.

한참 바다를 봤으니 산이 좋은 양양의 가을 제철 음식, 양양 송이를 맛보기로 했다. 양양은 계절마다 산이 내어주는 먹거리가 풍부하다. 봄에는 두릅, 곰취, 고사리 같은 산나물이 도처에 있고, 여름에는 달콤한 복숭아와 찰옥수수, 가을에는 송이버섯, 배와 감이 달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특히 양양 송이는 잃어버렸던 입맛도 다시 돌게 한다는 귀한 식재료다. 설악산을 중심으로 산지가 형성되어 해풍을 맞고, 다양한 수림대를 지니고 있어 특유의 맛과 향이 짙다고. 양양에서 송이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송이버섯마을’로 향했다. 얼마 전 자리 이전을 해서 보다 넓고 쾌적한 실내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메뉴에는 양양 송이의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소금구이, 전골, 샤부샤부, 불고기, 덮밥, 영양돌솥밥 같은 다양한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며 주인장이 추천하는 송이불고기를 주문하니 곱게 썰린 송이버섯과 양양 한우 불고기가 뚝배기에 담겨나와 지글지글 끓기 시작한다. 양양은 바다와 인접해 먹거리가 주로 바다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설악산의 기운과 동해안의 신선한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는 양양 한우도 이름나 있다.

깨끗한 1급수의 물을 마시고 좋은 환경에서 사육되도록 양양군이 생산과 판매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기도 하다. 불고기의 달콤한 양념을 당연시 여기며 양양 송이 한 점을 들었는데 순식간에 입안에 송이 향이 피었다. 깻잎이나 고수 같은 향신 채소를 먹을 때와는 달리 통통한 송이 질감에 풍성한 향이 실려오니 한층 감칠맛이 진했다. 당면이나 다른 채소는 없이 오직 양양 송이와 양양 한우만 들어가 깔끔한 맛이기도 했다. 반찬으로는 김치를 빼면 7가지 정도의 각종 버섯 반찬이 차려졌다. 생 버섯을 장에 살짝 찍어먹는 찬, 일일이 뜯고 말리고 다시 덖어 양념과 함께 내어주는 정성이 담긴 팽이버섯, 짜지 않게 절인 송이버섯, 매콤새콤한 양념으로 무친 목이버섯 등 버섯 먹고, 다시 버섯 먹는 차림상인데도 계속해서 다른 맛으로 다가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양양 송이는 술로도 빚는다. 송이 발효주인데 자연산 양양 송이를 원료로 저온에 오랫동안 발효해 고유의 향을 살려두는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편이라 이따금 기분 전환을 핑계 삼아 마시기에 부담이 없고 두통과 숙취가 덜한 편이라고.

또 다른 가을철의 양양 별미로는 연어가 있다. 우리나라 하천을 찾는 연어의 70% 이상이 양양군 남대천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송이 축제에 이어 연어 축제가 열린다. 또 고운 모양새에 과즙이 풍부한 낙산 배 역시 빼놓아서는 안될 맛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맛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양양 전통 시장이다. 100여개의 점포와 노점에서 농수산물, 산림부산물, 잡화, 각종 산열매와 약초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곳으로 설악권에서는 싱싱한 농산물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기로 유명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매월 4일과 9일(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에 열리는 5일장은 영북지역 최대 규모로 갓 따온 신선한 농산물을 저렴하게 사거나 옛날 통닭, 칼국수, 찹쌀 도넛 같은 간식거리도 즐길 수 있다. 1년내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열려 있는 양양 전통 시장에 야식을 사러 들렀다. 춘천에 닭갈비와 막국수가 있다면 양양엔 연어와 송이가 있듯, 속초에 만석닭강정이 있다면 양양에는 ‘송이닭강정’이 있다.

전국으로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조리를 시작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 다르니 찾아가 먹어보기로 했다. 뼈 있는 닭강정과 순살 닭강정, 순살 파 닭강정, 프라이드 종류 중에서 각각 순한맛과 매운맛 중 선택할 수 있는데 순한맛 순살 닭강정을 주문했다. 양양 송이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국내산 냉장육만 사용한다는 부드러운 살과 바삭한 튀김옷이 적당히 달콤한 양념에 버무려져 맥주와 함께 끝없이 들어갔다. 양념 맛이 보다 자극적인 만석닭강정에 비해 덜 짜고 덜 달았다. 한편 강원도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이라면 지난해 개봉한 ‘각자의 미식’이라는 영화를 참고하면 좋겠다. 강릉이 자신의 소울 플레이스라 믿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서울 출신의 주인공은 과도한 업무와 외로운 타지 생활에 지쳐버린다. 사직서를 제출하려던 날 퇴사 전까지 마지막 업무로 받은 것은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과 맛집에 대한 미식 다큐를 만드는 것. TV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음식 평론가와 강릉에 사는 외국인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촬영을 모두 마친 뒤에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속 맛집 추천을 볼 때와 같이 헛헛해진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모든 편집을 뒤집는다. 평론가의 맛 소개, 주인장의 인터뷰가 아닌 강릉 토박이인 직장 동료들에게 들었던 음식 이야기로 말이다. 장칼국수, 물회, 망치매운탕, 두부, 서지초가뜰 한정식, 커피 등의 요리는 마치 강릉의 풀이나 나무처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뻔하지 않은 음식으로 다시 조명된다. 그러니 때로는 어딘가로 떠나기 전 맛집부터 검색하는 버릇을 잠시 넣어두자.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골목을 거닐며, 간판은 허름하지만 어쩐지 주방의 살뜰한 수납이 내공 있어 보이는 식당으로 발길을 옮겨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맛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재미도 없다. 맛이 없어도 이 여행의 이야깃거리로 남을 터다. 남이 모르는 곳, 내가 우연히 찾은 가게를 만나는 기쁨을 가을의 강원도 여행에서 발견해보면 좋겠다.

김주혜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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