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반발 속 보완책 국회통과 미지수…정부 늑장대응 비판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향후 농업 협상이 새롭게 개시될 때 그에 따른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농업 관련 단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를 통해 쌀과 같은 국내 농업의 민감 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제도가 내실 있게 추진될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경제 선진국”

다수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다. 정부는 WTO에서 개도국의 지위를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한국을 비롯한 경제 강국들이 WTO에서 개도국 특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만 해도 국내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란 여론이 우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가 사실상 대(對)중국 통상 압박이란 시각이 많아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분석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정치·외교적 분석과 함께 명분상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제시한 4가지 경제 강국 요건인 ▲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기준 고소득 국가 ▲세계 상품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 0.5% 이상 국가에 한국은 모두 포함된다.

다만 정부는 이번 결정이 농업에 당장은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차후 농업 협상 때 개도국 지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것일 뿐, 그때까지는 현재 누리고 있는 혜택이 유지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2008년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면서, 협상의 재개 가능성조차 희박하다는 관측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현재 적용되고 있는 농산물 관세나 보조금은 차기 농업협상 타결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다”면서 “10년가량 사실상 중단된 농업협상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차 등으로 인해 앞으로도 의미 있는 논의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쌀 저율관세 등 여러 사항은 FTA(양자협상)가 아닌 WTO(다자협상) 차원에서 확정된 내용이다.

‘공익형 직불제’ 내세운 정부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를 보완책으로 내세웠다. 공익형 직불제는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정부가 자체 예산을 통해 쌀을 비롯한 국내 농업의 대다수 분야를 최대한 보호한다는 게 제도의 골자다. 정부는 내년 농업예산을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4.4% 인상했다고도 강조했다.

정부의 이 같은 입장에도 농업 관련 단체의 반발은 거세다. 농업협상 재개 가능성이 크지 않다곤 하나, 개도국 지위를 갑작스럽게 내려놓게 된 만큼 또다시 ‘만에 하나’의 상황이 닥칠 수 있어서다. 또한 정부가 이번 결정을 내린 과정도 영 미덥지 않은 데다, 공익형 직불제가 국회 문턱을 무난하게 넘을 수 있을 지도 걱정거리라는 평가다.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일사분란하지 못했다는 게 농업단체들의 판단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월 “WTO 보조금 규모 등 기존의 혜택은 당장 영향이 없고, 마무리 단계인 쌀 관세화 검증 협상 결과도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WTO 개도국에서 내려와도 큰 문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다음 달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한국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와 관련해 한국 농업의 민감성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국내 입장을 전달했다. 국내 농업의 현실에 기인해 WTO 개도국 지위의 유지 당위성을 피력한 것으로 홍 부총리의 진단과는 결이 달랐다.

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트럼프 시한을 이틀 넘겨서야 최종 결정을 내렸다. 공익형 직불제라는 대안이 있음에도 비판이 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서야 부랴부랴 추진하는 정책이 과연 실효성을 갖출 수 있겠냐는 것이다. 특히 약 3년 전 대선공약으로도 제시된 이 제도가 이제 첫발을 떼면서 늑장대응이란 비판도 따른다.

이 제도 도입에 관한 정쟁은 벌써 예고됐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 제도개편을 위해 약 1조원 수준의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여야 간 입장차가 또렷하다. 야당은 예산 확대를 주장하지만, 여당은 합의부터 개시하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국회 예산정책처에서는 안건 통과 전제사항인 농업소득보전법 개정안 심의가 이뤄지지 않다는 지적마저 나왔다.

이에 대해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농업개혁위원회 국장은 “정부가 농업 현실에 대한 종합적이고 면밀한 대책도 없이 각종 사항들을 경솔하게 결정해버렸다”며 “공익형 직불제와 더불어 내놓은 농업재해보험제도 개선 등의 조치 역시 진즉에 추진돼 왔던 정책들을 짜깁기 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관계자도 “지난 7월 미국 무역대표부의 WTO 개도국 지위 개혁 요구에 (정부가)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며 “짧게만 3개월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농업계와 그 어떤 소통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 대책마련에도 소홀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WTO 선진국 반열에 든 한국은 미래 농업협상 시 농산물 관세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이 경우 수입산 쌀은 현재 513%에서 일반품목 154%, 민감품목 393%로 낮아질 전망이다. 그 외 마늘은 360%에서 296%, 인삼(홍삼)은 754.3%에서 578%, 양파는 135%에서 104% 정도로 낮아진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여러 농민단체는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이들 단체는 “농가소득 대비 농업소득 비율, 국가예산 대비 농업예산도 역대 정권 중 가장 수준을 기록 중인 상황에서 농민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응답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경실련 등 일부 시민사회는 정부안과 다른 내용의 입법안을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현웅 기자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