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 선수들 순발력 떨어지고 수비·주루에 악영향… 투고타저 속 ‘교타자’ 변신

안치홍 선수가 지난 1월 28일 부산 부산진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입단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

20여 년 전 근육질의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프로야구에 데뷔하면서 KBO리그에는 줄곧 ‘벌크업’ 열풍이 불었다. 타고투저의 흐름 속에 근육을 키워 장타력을 높이겠다는 심산으로 많은 타자가 웨이트 훈련으로 몸을 불렸다. 실제로 장타율과 홈런이 확 늘어나면서 효과를 본 선수들도 꽤 있었고, 리그 전반적으로 홈런의 양도 확 늘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파워는 얻었지만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수비력과 주루에 악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지난 시즌 바뀐 공인구로 인해 투고타저 흐름까지 겹치면서 타격에서도 신통치 않은 성적이 이어졌다. 벌크업에 도전했던 기존의 호타준족형 선수들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즌을 마치며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리고 2020년, 투고타저의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벌크업 열풍은 확 사그라들었다. 벌크업으로 몸을 불렸던 선수들도 다시 이전의 날렵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장타보다는 타격의 정확성에 초점을 두는 한편, 순발력을 회복시켜 수비력 강화도 함께 꾀하고 있다.

2루 자리 뺏기고 ‘번쩍’, 벌크업 포기로 부활 노리는 안치홍

지난달 28일 롯데 입단식을 치른 안치홍은 한층 홀쭉해진 모습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입단식에서 “벌크업에 치중한 나머지 내 기량을 발휘할 수 없는 몸을 만든 것 같다”라며 지난 시즌의 부진을 되돌아봤다. 안치홍은 벌크업을 통해 2017년과 2018년 20홈런 이상을 때려내며 타격에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지만 수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넓은 수비 범위로 소속팀의 수비에 기여한 정도를 가늠하는 ‘수비 범위 관련 득점 기여도(RNG^스탯티즈 기준)’에서 안치홍은 2017시즌 -1.31을 기록한 이후 2018시즌에는 -7.65, 그리고 지난해에는 -10.31을 기록하며 해가 갈수록 수비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설상가상 안치홍은 지난 시즌 도중 약 10년간 지켜왔던 2루를 떠나 1루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KIA는 안치홍이 나이가 들면서 수비력이 하락세에 있다고 판단, 그를 2루수가 아닌 1루수 자원으로 분류했고 이는 시즌 후 FA 협상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안치홍은 FA를 통해 2루 자리를 보장받은 롯데로 이적했다. 안치홍의 부활 의지도 확고했다. 자신의 벌크업이 지난 시즌 부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냉정히 평가한 안치홍은 비시즌 동안 체중을 줄이고 순발력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벌크업을 버리고 다시 이전 모습을 회복하면서 2루수로서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안치홍이다.

구자욱-이원석, 장타력 살렸지만 장점 죽인 무리한 벌크업

삼성에도 ‘복귀’ 바람이 불고 있다. 구자욱과 이원석, 박해민 등이 벌크업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구자욱은 해마다 해왔던 벌크업의 강도를 2019시즌을 앞두고 확 올렸다. 팀의 중심타자로서 장타와 홈런 생산량을 늘리고자 하는 욕심에서였다. 하지만 구자욱 역시 지난 시즌 고배를 마셨다. 구자욱은 수비보다는 공격에서 손해를 많이 본 케이스다. 지난 시즌 구자욱의 타율은 2할6푼7리로 2015시즌 데뷔 이후 처음으로 2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반발계수가 확 줄어든 공인구 여파에 직격타를 맞았다. 주루 관련 세부 지표는 더 심각해졌다. 구자욱의 장점인 ‘호타준족’이 사라졌다. 빠른 발로 내야 안타를 만들어내는 바빕(BABIP) 지표에 따르면, 구자욱은 데뷔 후 네 시즌 동안 3할대 후반의 기록을 유지했지만 2019시즌에는 0.296으로 확 떨어졌다. 구자욱의 장점이었던 내야안타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전반적인 타격 성적도 덩달아 크게 하락했다.

이원석도 벌크업의 수혜를 많이 받았다. 2017년 삼성 이적과 함께 벌크업으로 몸을 불린 이원석은 그해 18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장타력을 과시했다. 이후 세 시즌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타격에서 벌크업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이원석 역시 벌크업 이후 수비력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수비 범위가 이전보다 크게 줄었고, 수 년간 한 자릿수를 유지했던 실책 기록이 벌크업 이후 두 자릿수로 확 늘었다. 두산 시절 그가 자랑하던 폭넓은 수비와 스피디한 수비, 그리고 멀티포지션 능력 등은 벌크업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결국 이원석 역시 벌크업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허삼영 삼성 감독은 “이원석이 방향을 잘못 잡아 몸이 커졌다. 자신도 방향성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비시즌 동안 스피드를 살릴 수 있는 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라며 그의 변화를 예고했다.

무분별한 벌크업은 ‘NO’, 정확한 방향성이 관건

하지만 벌크업이 무조건 악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키움 이정후는 해마다 꾸준한 벌크업으로 체중을 키우고 있지만 오히려 타격과 수비 성적은 날로 좋아지고 있다. 방향성의 차이다. 이정후는 이전에 언급한 선수들과는 달리 ‘장타력 상승’이 아닌 ‘체력 유지’를 목표로 한 벌크업을 진행하고 있다. 풀타임 시즌을 치를 수 있는 체력을 키우고, 부수적으로는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와 순발력을 살리는 방향으로 벌크업을 시도하고 있다. 결국 벌크업은 방향성의 문제다. 2010년대 초반, 강정호와 김하성 등 선수들의 벌크업으로 재미를 봤던 히어로즈(당시 넥센)도 무분별한 벌크업은 경계했다.

윤승재 스포츠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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