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大 해군 제독 中 한 명인 라위터르 발탁, ‘무적함대’ 스페인·英·佛 해군 줄줄이 격파

네덜란드 요한 드 비트 총리의 초상화.

네덜란드라는 국가의 출발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은 17개 주 가운데 북부에 위치한 7개 주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종교적 억압과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80년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다.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붕괴되고, 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된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대륙의 유럽’과 ‘해양의 유럽’이 만나고 충돌하는 유럽 역사의 급소에 자리한다. 오라녀 공 빌렘(Willem van Oranje, 네덜란드어 ‘오라녀 Oranje’는 영어의 ‘오렌지 Orange’에 해당)은 격동의 유럽 근대사에서 네덜란드를 독립국가로 일으켜 세운 국부다. 네덜란드를 세계강국으로 만든 위대한 인물은 요한 드 비트 총리, 네덜란드의 이순신 장군인 미힐 더 라위터르 두 명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네덜란드 독립국가 출발 즈음에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연합하여 막강한 스페인에 대항하여 승리했고, 유럽의 패권 판도를 바꾸었다. 경제적으로는 향신료 구입비율과 가격을 담합하는 협정을 맺는 등 국제상권을 공동으로 장악했다.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의 수상 헨리 존 파마스턴은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이익이 있을 뿐이다”라는 냉엄한 국가관계의 진리를 설파한 바 있다. 사실 영국 외교의 실리위주 포지셔닝은 아편전쟁보다 2세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와의 관계에서 시현됐다.

선공을 취한 쪽은 국제상전의 선두주자 네덜란드였다. 향신료 국제상전에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와 함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다. 후발주자인 영국이 국제상전에 뛰어들면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협력관계는 경쟁관계로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을 몰아내고 향신료 무역독점을 꾀했다. 네덜란드가 자신들이 지배하는 암본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주의 주도)을 공격한 영국인을 처형한 1623년의 ‘암보이나 사건’은 그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암보이나 사건은 결과적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을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바꾸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전쟁의 동인은 유럽에서 일어났지만, 실제 전쟁은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벌어졌다. 해양 파워(Sea Power) 쟁탈전이 전쟁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영국보다 선박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1670년 경 네덜란드의 보유선박 총톤수는 영국의 3배였다. 조선기술에서도 단연 세계 최고였으며, 영국보다 40~50% 싼 비용으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새롭게 부상하는 영국과 세 번의 해전에서 선전했지만, 뉴욕을 잃는 등 해운업과 무역업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22년에 걸친 네덜란드와 영국 간 전쟁(제1차 전쟁: 1652~54, 제2차 전쟁:1665~67, 제3차 전쟁:1672~74)은 네덜란드 무역활동의 전성기와 영국이라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이 충돌하는 시점에 벌어졌다. 세 차례 전쟁에서 네덜란드 쪽 영웅은 단연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Adriaanszoon de Ruyter^1607~1676년)’ 해군제독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1세 때부터 선원생활을 하면서 항해술과 여러 나라 말을 익혔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641년에는 네덜란드 해군 소장 신분으로 참전하여 포르투갈 해군을 지원했다. 1642년부터 1652년까지 모로코, 서인도 제도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선의 선장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진행 중이던 1652년~1654년 네덜란드 해군에 복귀했다. 마르턴 트롬프(Maarten Tromp) 해군 총사령관이 지휘한 네덜란드는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무기와 함선의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한채 끌려다녔다. 결국 헤이그 근처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1653년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면서 네덜란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게 된다. 네덜란드 해군의 총사령관이던 마르턴 트롬프가 전사하자, 미힐 더 라위터르는 네덜란드 해군 중장으로 임명됐다.

제1차 전쟁에서 쓴맛을 본 네덜란드는 절치부심하며 재정과 군비를 재정비했다. 1665년 제2차 전쟁에서 네덜란드 해군총사령관으로 발탁된 라위터르 제독은 해군함 증강과 효과적인 신호체계를 갖고 전쟁에 임했다. 1667년 6월 1일에는 ‘4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6월 9일에는 영국 채텀 인근 ‘메드웨이’ 기습을 통해 영국 선박 13척을 불태워 버리고 템스 강 하구를 봉쇄했다. 이 메드웨이의 기습은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라고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전쟁 시기인 1666년으로 돌아가 보면 영국의 국가상황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알 수 있다. 런던 대흑사병(1665~1666년) 창궐과 런던 대화재 등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영국의 목줄이라 할 수 있는 템스 강 하구 해전에서 패배했고, 결국 1667년에는 브레다에서 네덜란드에 유리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브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양국의 영토는 대략 현 상태 유지, ②잉글랜드는 뉴 암스테르담(오늘날 뉴욕)을 얻고, 네덜란드는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을 확보, ③영국의 항해 조례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 재확인’ 등이다.

네덜란드 화폐 100휠더에 새겨진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

라위터르 제독은 1672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도 영국^프랑스 연합함대와 싸워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왕이나 최고권력자로부터 전쟁영웅이 질시와 모함을 받는 것은 동서양이 똑같은 법. 한나라 건국 영웅 한신 장군이 유방에게 잡혀죽으면서 남긴 ‘토사구팽 (兎死狗烹)’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회자된다. 네덜란드 빌렘 3세 왕은 자신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던 라위터르를 시기한 나머지 1675년 스페인 해군을 도우라는 명령과 함께 지중해로 쫓아낸다. 라위터르 제독은 1676년 4월 22일 시칠리아의 아우구스타 해전에서 네덜란드-스페인 연합 해군 진영에 참전하여 전투를 벌이던 중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전쟁사에서 그가 남긴 무훈은 명확하다.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해군을 이끌면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쳤고, 해양강국이 된 영국과 전통적 강국 프랑스의 연합함대와 싸워 무공을 세운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한 이유로 라위터르 제독은 호레이쇼 넬슨이나 이순신과 더불어 세계 해군 역사에서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장군을 추앙하듯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라위터르 제독을 해신으로 추앙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발탁한 백락의 눈을 가진 인물은 영의정 류성룡이었고,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호레이쇼 넬슨 제독을 발탁한 인물은 영국 해군의 아버지 존 저비스 경이다. 라위터르 제독을 해군 총사령관으로 발탁한 인물은 네덜란드 총리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1625∼1672)였다. 두 사람은 절친하기도 했다.

요한 드 비트의 아버지 야코프는 여섯 차례나 도르트레흐트 시장을 지냈을 정도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홀란드(또는 홀란트) 주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였다. 요한 드 비트의 출세는 부친의 정치적 기반 위에 스스로 뛰어난 웅변술과 명민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수학과 법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저서인 <분석기하학>은 당대의 수학 교재로 활용되었다. 요한 드비트는 부친의 명성, 본인의 명석함에 더하여 당시 세도가였던 비커르(Bickers) 가문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함으로써 삼박자를 갖추게 된다. 공화국의 중요한 문제들을 거침없이 결정해 나갈 모든 요소를 갖추었던 것이다. 1653년 28세의 요한 드 비트는 홀란드 주의 총리(1653∼1672년)가 되었고, 이후에도 내리 세 번 당선됐으며 죽기 바로 전인 1672년까지 재임했다. 홀란드는 네덜란드의 핵심지역이었으며, 실제적으로 네덜란드를 이끌던 지역이다. 요한 드 비트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제1^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54년, 1665~67년)을 이끌었다. 그는 국가의 해군력과 상권을 강화했다. 영국과의 제1차 전쟁이 끝난 후 요한 드 비트는 해군력을 더욱 강화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개인들의 상선을 용선해서 전함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규모나 무장에 있어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요한 드 비트 총리는 두 차례에 걸쳐 30척씩 제대로 무장된 전함을 건조케 했다. 육군은 최소한의 수준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한 드 비트의 외교정책은 탁월했다. 네덜란드의 안위는 제3국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각 참가국끼리 현 상태(Status Quo)를 보장하는 내용의 비폭력적인 상호방어조약을 통해 안보를 지켜나가는 ‘능동적 중립주의(Active Neutrality)’로 방향을 잡았다. 요한 드 비트 총리는 네덜란드의 전성기 ‘해가지지 않는 네덜란드’를 구축했다. 요한 드 비트 총리의 재임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근대 국가를 구축한 두 명의 걸출한 지도자가 거의 동시대에 활약했다. 그들은 총리로서 리더십과 책략으로 각 나라를 막강한 나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영국에서는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혁명(1642~1651)을 일으킨 후 호국경(Lord Protector,1653∼1658년)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태양왕 루이 14세 왕권 하에서 장 뱁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가 재상(1665∼1683년)을 맡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해양강국을 만들면서 근대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지만, 말년에 왕정과의 권력투쟁 또는 질시로 비참하게 생을 마친 점도 유사하다. 권력무상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크롬웰이 1691년 네덜란드 중계무역 활동을 제한하는 <항해조례>를 제정한 것이 영^네 전쟁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크롬웰은 영국 내치에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때 비트는 네덜란드 독립기반을 구축한 오라녀(Oranje)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비밀협정을 크롬웰과 맺은 후 1654년 웨스트민스터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의 크롬웰이 죽은 후 벌어진 전쟁이었다. 중상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프랑스의 콜베르는 ‘한 나라의 부는 그 국가가 보유하는 금과 은의 양으로 결정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다른 나라로 금과 은의 유출을 막는 동시에, 국내 산업을 진흥하여 수출을 늘려서 금과 은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베르는 무역에서 보호관세주의를 택하고, 국내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여 보호육성책을 펴나갔다. 영국도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이 중상주의를 택했고 네덜란드를 견제하면서 국가 경제력을 키웠다. 영국의 크롬웰과 프랑스의 콜베르는 비슷한 시기에 중상주의를 해양책략으로 삼았고, 해군력을 키워 해양패권 국가로 키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후발주자인 프랑스 콜베르의 중상정책은 네덜란드나 영국 등 경제선진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당시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대립, 왕권전쟁 등으로 영일이 없었다. 콜베르는 재무장관이 되기 전에 ‘해군장관’을 역임했고, 1669년에는 해군^무역^해외영토 등 국정에 관한 최고책임자라 할 수 있는 재상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시 파워 (sea power)’의 진가를 이해하고 실천한 최초의 프랑스 정치가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며, 영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이룩한 경제적 성취에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요한 드 비트 총리는 주변 열강대국들을 대상으로 균형정책을 펴 나갔다. 전회에서 언급했듯이 ‘외교 천재’ 비트 수상의 성공적 협상은 훗날 역사상 최악의 협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네덜란드가 육두구 산지인 인도네시아 반다제도의 ‘플라우 룬 섬’을 얻는 대신 영국에 훗날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될 뉴욕 맨해튼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요한 드 비트 총리의 권세는 나날이 확대됐지만 1668년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내부로는 영국의 찰스 2세가 후원하는 빌럼 헨드리크 세력이 비트에 저항했고, 외부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합동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한창 전쟁 중인 1667년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벨기에) 지역을 침공했다.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는 네덜란드에 일련의 경제 제재조치를 취했다. 1672년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했고, 해군보다 육군이 강한 프랑스에 의해 해군보다 육군이 약한 네덜란드는 지상전에서 패배했다. 네덜란드가 영국과 프랑스 양 강대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동시에 맞이하면서 ‘재난의 시기’를 보내던 1672년 8월 21일, 요한 드 비트는 자신이 가르치고 키운 빌럼 3세와 권력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그저 허망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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