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책사가 된 마한

‘마하니즘(Mahanism)’을 정립하고 TR의 해양책사로 활약한 알프레드 마한과 그의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

해방과 내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숨 가쁘게 내달려 온 대한민국 호는 근래 들어 동북아 세력 재편, 보호무역주의의 대두 등 미증유의 시련에 직면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가,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얻을 것인가. 한국 해양정책의 석학인 홍승용 박사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중세 및 근현대를 넘나들며 ‘해양을 통한 부국과 강국의 조건과 성취’를 탐문한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고, 열 번 이상 읽은 자와는 감히 상대도 하지 마라.’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수많은 지도자들이 고전을 꼽을 때 삼국지가 언제나 1위를 차지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처럼, 현재의 우리는 유비의 덕성과 조조의 지략, 그리고 손권의 중용을 고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일류의 지도자와 일류 책사는 일류국가를 만들지만, 삼류 지도자와 삼류 책사는 망국으로 이끌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입까지 팍스 아메리카나 건설을 위한 미국의 핵심책략은 ‘해양력’이었다. 미국의 해양력을 총지휘한 시어도어 루스벨트(TR) 대통령, 일선에서 정책집행과 외교문제 해결을 한 국무장관 존 헤이, 해양력 이론으로 TR의 제갈공명 역할을 한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 1840~1914)의 만남은 일류 지도자와 일류 책사들이 미국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단번에 바꾼 사례다.

20세기 초반 거의 동시대에 등장한 세계 3대 지정학자는 ‘해양력(Sea Power) 이론’의 알프레드 마한, ‘심장부(Heartland) 이론’의 핼포드 매킨더 경, ‘연변지역(Rimland) 이론’의 니콜라스 스파이크만 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심장부 이론은 구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채택한 반면, 해양력 이론은 미국과 서방 자유국가들이 채택했다. 두 이론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융합한 것이 심장부와 해양력이 마주치는 연안주변 지역이 중요하다는 림랜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마한의 해양력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과 영국, 독일, 일본 등 수많은 나라의 해군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21세기 현재에도 미국과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힘겨루기를 함에 있어 수비와 공격의 전략교범이다.

마한은 1854년 불과 14세 때에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 조기 입학하였지만 2년을 다닌 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그는 상선 선원, 해군사관 등을 거친 제임스 쿠퍼의 작품인 <도선사(Pilot)> 등 해양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전교 차석으로 졸업한 후 1896년까지 40년 간 현역생활을 했다. 그는 함정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해군 군함이던 범선의 구조와 전력의 전문가가 되었고, 극동아시아 유럽 남미 등으로의 원양항해를 통해 시야를 넓혔다.

해군참모총장이나 제독이 되기 위해서는 야전인 함정근무를 선호해야 했음에도 마한은 안정적 환경에서 해군전략 이론연구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해군전쟁대학(Naval War College)’은 마한에게 최고의 선택지였다. 마한은 1885년부터 로드아일랜드 주의 뉴포트에 소재하는 해군전쟁대학에서 함대전투의 전술과 해양력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강의를 하였다.

마한의 강의 내용의 핵심은 나폴레옹의 제갈공명이었다가, 나폴레옹과 헤어진 후 러시아 육사를 창설한 천재 전략가 앙리 조미니의 육전전략을 해군전략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마한은 해군전쟁대학에서 행한 강의에서 1660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7번의 전쟁과 30여 차례 해전을 비교하면서 영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인 해양력을 분석하고, 무역의 힘과 대 해군의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강연은 훗날 해양력과 해군의 성경으로 불리는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660-1783>으로 출판되었다. 마한은 은퇴할 때까지 <1793~1812 프랑스 혁명과 제국에 바다 힘의 영향, 1892>, <1812년 전쟁, 1905년>, <영국 넬슨 제독 전기>, <영국 해양력의 구현, 1897> 등 총 20권의 책과 137개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마한은 해양력과 군사학에서 세계적 권위를 얻었으며, 미국의 하버드대, 예일대, 컬럼비아대, 다트머스대, 캐나다 맥길대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로부터도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마한만큼 유럽과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은 학자는 전무할 것이다.

마한은 1885년 해군전쟁대학에 부임했을 때 초대 학장이던 스티븐 루스의 권유에 따라 ‘해상 전력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됐고, 해군전쟁대학 제2대와 제4대 학장(제1차 1886~1889, 제2차 1892~1893)을 역임했다.

마한이 학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1888년 미래의 대통령 TR이 특별 초청강사로 오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마한의 해양력 이론은 해군사와 통상관련 전문가들과의 서신교류와 토론에 힘입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영국의 해군제독인 콜롬 형제는 마한과 전화통신 등을 통해 폭넓게 지식을 교환했지만, 동 시점에 발표된 마한의 이론 때문에 훗날 그 가치가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콜롬 제독은 비록 마한이 창안한 ‘해양력’이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해양력에 해당하는 ‘제해권’의 중요성과 전략을 1891년에 저술한 그의 책 <해군전쟁(Naval Warfare)>에서 예리하게 제시했다. 이는 별도로 연구하고 있던 마한의 해양력 이론과 매우 흡사했다.

마한은 해양력이 역사의 진로와 국가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해양력의 역사는 해양에서 또는 해양에 의해서 국민을 위대해지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역은 국부의 원천이다. 무역은 항만과 해로가 보호되어야 안정될 수 있으며, 이는 강력한 해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바다는 모든 방향으로 통행할 수 있는 거대한 고속도로이다. 강력한 해군은 평시에는 국부를 증진시키며, 전시에는 전쟁의 승리를 보장한다.”

마한은 해양력의 요소를 ‘선천적 요인’과 ‘인위적 요인’으로 분류했다. 마한은 기본적으로 자연적 조건이 갖춰진 환경 하에서 인위적 조건을 조화시키는 것이 해양력에 의한 국가번영을 추구하는 첩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위적 요인은 정부의 성격이다. 그는 해양력 정책을 시대의 흐름과 통치자들의 성격과 예견력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 가변요소로 보았다. 선천적 요소는 다섯 가지로 ①국제환경으로서의 지리적 위치 ②국내고유의 자연조건으로서의 물리적 형태 ③항구에 적합하고 해양개척에 용이한 배후지의 크기 ④해양업무에 종사하는 인구 ⑤해양을 통해 국가번영을 추구하고자 하는 국민성 등이다.

마한은 국가 해양력 발전을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좋은 정치 및 해군 리더십이 지리적 환경보다 더 중요하다. 둘째, 정치적 분석 단위는 단일 국가가 아닌 다국적 컨소시엄이다. 셋째, 경제적 목표는 ‘자유무역(free trade)’이다. 넷째, 전략에 미치는 영향은 지리적 조건보다 비상계획의 힘에 의해 제어된다고 주장했다.(출처 <위키피디아>)

마한의 해양전략과 전술의 프레임은 앙리 조마니의 영향에 크게 힘입었다. 그는 해상전략과 육상전략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했다.(출처 김현기 <현대해양전략사상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8) 먼저 공통점으로는 ①전투행위의 직접목표는 적군 격파이다. ②전략은 군사력과 노력에 비례한다. ③병참의 전략적 위치가 중요하다. ④분산과 집중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하다. 차이점으로는 ①육전은 기습, 기만, 유격전 등으로 적을 돌파하거나 또는 양날개를 우회하여 적을 격파한다. 반면 해전은 양날개의 우회와 돌파는 함정을 침몰시키지 않는 한 무의미하며, 기동력이 뛰어난 함대 세력 간 무기도달 거리가 중요하다. ②육전은 상호여건이 대등한 경우 공격군은 2.5배 이상, 방어 시에는 3분의 1 병력으로 대응이 가능하다. 해전은 우세한 무기체제가 관건이고 상호여건이 대등한 경우 방어에는 1대 1의 군사력이 필요하다. ③육전은 자연조건에 크게 영향받으나, 해전은 자연조건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④육전은 심리적 요소가 크나, 해전은 심리적 요소보다 물리적 전투력 요소(탐지능력, 기동성, 공격과 방어능력 등)가 중요하다.

알프레드 마한은 TR이 국방성 해군차관 때부터 대통령 재임 시기까지 전략참모로서 측근에서 활약했다. 당시 TR은 ‘해양력’ 분야의 독보적 학자인 알프레드 마한과 긴밀히 교류를 했고 ‘마하니즘(Mahanism)’을 열렬히 실천했다. 하와이제도 합병, 파나마 운하건설, 괌과 푸에르토리코에 항구적 미국 해군기지를 건설하길 원했다. 동시에 일류의 해군함대 건설로 대양해군을 육성했고, 중남미 및 카리브 해역에서 스페인 축출 등을 심도 있게 검토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처럼, TR에게 마한은 해양력에 관해 스승이었고 열렬한 친구였다. 그는 마한의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660-1783>에 대해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1890년 10월호에서 적극적으로 호평했고, 1897년에는 ‘더 북맨(The Bookman)’ 마한이 쓴 <영국 넬슨 제독 전기>에 대해서도 극찬했다. 아울러 마한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속상관인 존 롱 해군장관에게 더 강한 해군함 구축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이 해양력을 바탕으로 강대국이 되려면 ‘대양해군 육성, 해외 해군기지 확보, 파나마운하의 건설, 하와이의 미국영토 편입 등 4대 해양책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한 제독의 4대 해양책략은 이후 TR에 의해 하나하나 실천됐다. 미국은 그 당시만 해도 청나라보다도 못한 세계 12위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1897년 TR은 38세의 나이에 국방성 해군차관이 되면서 대양해군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은 서부개척 대신 대양으로 새로운 개척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TR의 해양참모인 마한은 때맞추어 1897년 저서인 <해양력에 대한 미국인의 이해 : 현재와 미래>를 통해 카리브 해를 미국의 내해처럼 세력 범위로 해야 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고 극동에서 미국의 입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9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해군이 큰 역할을 하여 승리를 거둔 미국은 동쪽으로는 카리브 해, 서쪽으로는 필리핀을 장악했다. 1893년 태평양 중간에 있는 하와이를 합병했고, 2년 후에는 순식간에 세계 5위의 해군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TR대통령은 대양 해군의 힘으로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를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를 건설했고, 베네수엘라에 대한 영국과 독일의 야심을 저지했다. TR의 대 함대는 세계 일주를 위해 1907년 12월 출항 후 한 건의 대형사고도 없이 1909년 2월 21일 무사 복귀하여 미 해군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은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지상군은 최소규모만 유지했지만,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영국과 같은 규모를 배정받았을 정도로 강력한 해군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해군은 당시 세계 3위의 일본 해군을 전멸시키면서 노쇠한 영국 해군을 제치고 세계 바다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특히 항공모함 전단은 그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이었다. 결과적으로 마한의 시 파워(Sea Power) 이론과 주장은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에게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요구하는 ‘거대정책’의 이론을 제공했고, 그때까지 대서양 국가이던 미국은 태평양 국가, 그것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TR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마한 제독의 전략을 계승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양쪽으로 아우르는 세계 패권국가가 됐다. 동시에 수에즈운하·파나마운하·말라카해협 등 전 세계의 중요한 해상 길목을 점유하면서 세계무역과 경제도 통제해 오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20세기 초강대국이 된 것은 막강한 해양력 덕분이며, 이를 근간으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를 열었다.

마한의 해양책략은 전 세계 해군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때문에 1890년대 유럽의 해군력 증강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미국이 유럽의 불간섭을 원한다는 먼로주의를 벗어버리고 태평양으로 본격 진출하겠다는 무력 논리를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마한이었다. 그는 미국의 강한 해양력은 ‘제2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선언했다. 마한의 ‘해양력 사상’은 지금도 미국 해군 교리 곳곳에 침투해 있다. 가장 위대한 해양책사인 마한이 74세로 세상을 떠난 5년 후 최강 해양대통령인 TR도 세상을 떠났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에는 그를 기리는‘마한 홀’이 있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