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분쟁 지역으로 부상한 제7광구
‘적벽대전’ 승리 위한 ‘제갈공명’ 필요해

제7광구가 한중일 분쟁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은 해양 시추선 ‘두성호’.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련없음) 한국석유공사

한·일 7광구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 체결 직후 일본의 조야와 언론은 크게 비판했다. EEZ시대가 도래하면 대륙붕 권원에서 ‘자연연장 논리’보다 ‘중간선 논리’가 우세할 터인데 한국의 자연연장 논리에 밀린 것은 실패한 협상이라 했다.

당시 일본의 국내외 정세는 격변기였다. 닉슨 독트린에 의한 중국의 세계무대 등장과 동중국해와 황해 대륙붕을 해양권원으로 주장하는 중국의 거친 공세, 제1차 오일쇼크에 뒤이은 제2, 제3의 오일쇼크 파동을 우려한 상황에서 일본이 공동개발이라는 제3의 방안을 채택한 것은 최악이 아닐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당시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과 해양문제 타결에서 리더십이 탁월했던 사토 에이사쿠(총리 재임 1964~1972년) 총리가 국가 리더였다. 외교부를 중심한 협상팀은 막강했고, 국제사법재판소 ICJ의 재판관을 보유하는 등 국제법의 세계조류 파악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륙붕 책략의 승리는 미스터리다. 약체의 한국 국가 축구 대표 팀이지만 소수의 스타플레이어에 의한 공격 전략으로 팀워크에 의한 수비전략의 일본 국가축구 대표 팀을 이긴 것과 비유될 수 있다. 운동경기와 전쟁의 승패는 병가지상사이지만, 해양영토문제는 자칫 영구적 게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복기가 필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일 대륙붕 전쟁에서 한국 측이 외교적 승리를 거둔 역사의 이면에는 탁월한 외교책사들이 있었다. 많은 책사들이 활약했지만, 협상 당시 한국 측의 최전선에 있었던 대표적 책사는 조광제 외무부 조약과장(재임1968~1970년, 훗날 주 스페인대사 역임)과 권병현 사무관(훗날 주중대사 역임)이었다 (신동아 679호, ‘2028년 일본이 영유권 주장할 7광구의 과거·현재·미래’, pp.160~165, 2016.4.).

1969년 한 일본신문에 “제주도 서남방과 일본 서북방의 대륙붕이 겹치는 지역에서 니혼세키유와 데이코쿠세키유가 제3국과 제휴하거나 단독으로 석유탐사 및 시추를 계획하고 일본정부에 그 허가를 신청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조 과장과 권 사무관은 문제의 기사를 중대한 국가사안으로 인식했고, 즉각 국가책략으로 대응하는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그들은 1958년 제네바협약과 1969년 국제사법재판소 판례를 면밀히 검토한 후 대한민국의 대륙붕관할권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들은 한국의 대륙붕 권역을 한반도의 자연적 연장이 끝나는 류큐 해구까지로 하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의 초안을 잡고 정부는 1970년 1월 법을 제정하였다(신동아 679호, 상동).

그 후 그들은 한국이 관할하는 대륙붕 권역을 위도와 경도로 표시하는 내용을 1970년 5월 대통령령인 ‘해저광물자원법 시행령’에 집어넣었다.

대륙붕에 대한 국제법적 권한을 국내법으로 민첩하게 선점했다. 중간선 안쪽은 국제법상 자국이 관할권을 가진 것으로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던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그 후 몇 년간의 밀고 당기는 협상과정을 거쳤지만, 조과장과 권 사무관은 남한 면적의 84%인 8만 4000㎢ 바다를 확보해 7광구에 관한 협상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신동아 679호, 상동).

그 후 일본은 박정희 정부의 7광구 관할권 선포에 반발하며 한·일 공동개발구역(JDZ)을 제안했다. 한국 측은 포항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자금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1974년 1월 30일 한·일 양국은 영유권 문제는 추후 논의하기로 하고, 대륙붕 협정을 맺고 ‘한·일 공동개발구역’을 설정했다. 두 사람은 외교협상의 관례인 톱 다운(Topdown) 방식을 깨고, 특이하게 보텀 업(Bottomup) 방식으로 역사에 남을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지금은 바다를 두고 싸우는 시대다. 앞으로 해양법 다툼이 치열할 것이다. 뒷받침할 이론을 세워야 한다. 조약을 담당하는 외교관은 나라의 변호사로서 국가이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조광제 조약과장의 말이며, 그 후 외무부 조약과와 조약국은 맹장들의 산실이 됐다.

외무부 장관과 조약국의 특별 자문으로 활약한 전문가는 극소수였다. 국내는 이한기 서울대학교 법대교수(훗날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 역임)가 중심이었고, 국제적으로는 동북아시아 해양법 거목인 박춘호 박사(1930~2008)가 활약했다.

이한기 교수는 한국국제법학계의 기틀을 세웠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이한기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국가가 영토문제에서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 권리는 결코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박춘호 박사는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아시아 지역 어업의 국제 규제에 관한 법과 국가관행》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하버드대, 하와이대 교수를 거쳐 1982년부터 1995년까지 고려대 법대에서 국제법을 가르쳤다. 1973년 첫 회기부터 1982년 마지막 회기까지 매년 제3차 유엔해양법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가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 법률 연구소에서 국제법의 미개척 분야이자 뜨거운 이슈였던 아시아 해양 분쟁과 대륙붕 석유자원 분쟁 등을 연구했다. 그는 뉴욕 타임지와 유명 국제학술지 기고로 세계적 명성의 저명학자로 미국 해양법 연구소 집행 이사, 국제 해양 법학회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다. 2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국제해양법재판소는 국가 간 해양 분쟁의 해결을 위해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1996년에 설립되었다. 그는 1996년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초대 재판관에 당선됐다. 2005년에 재선된 후 2008년 세상을 떠나면서 후임으로 서울대 교수인 백진현 재판관이 중책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책사는 오와다 히사시(1932년 생) 외무성 조약과장이었다. 오와다는 그 후 외무성조약국장, 외무성차관과 유엔대표부 대사의 관직을 거친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1993년 서울에서 외무부와 한국해양연구소 주관으로 개최된 하와이대 해양법연구소 연차대회에서 “국제해양질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으며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관료생활을 마치고 하버드대, 뉴욕대,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로 활동했고, 일본 도쿄대와 와세다대 법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국제법 학자의 길을 걸었다. 탁월한 국제법 학자로서 오와다는 국제사법재판소 ICJ 재판관(2003~2019)에 선임됐고 ICJ소장의 중책(2016~2019)을 역임했다. 그는 외무성 관료로서뿐만 아니라 국제법 학자로서도 일본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거기에 덧붙여 오와다 재판관이 유명한 것은 그의 딸 마사코가 일본 황태자 나루히토와 결혼함으로써 황태자의 장인인 점이다. 오와다 재판관은 2019년 10월 아키히토 천황에 이어 새로운 천황 나루히토의 레이와시대 개시와 함께 ICJ 재판관 직을 사임했다. 그의 후임은 도쿄대 국제법 교수인 이와사와 유지에가 승계했다.

오와다 히사시라는 걸출한 국제법 및 해양문제 전문가가 천황과 일본 총리, 그리고 외무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보유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일대륙붕 공동개발협정이 유명무실하게 40여년이 경과하고 있는 것도 오와다 히사시의 무서운 책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당시 오와다 히사시 조약과장의 특별자문관은 오다 시게루(1924년생) 였다. 오다 시게루는 도쿄대와 예일대 법학박사이며, 도호쿠대의 교수를 역임하고 1976년부터 2003년까지 27년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오다 시게루의 후임은 오와다 히사시가 2003년부터 2019년까지 16년간 바통을 이어받았다.

1946년 출범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국제연합의 사법기관으로 설립되어 국가 간의 법적 분쟁을 국제법에 따라 해결하고, 유엔기관과 특별기구의 법적 질의에 대한 권고적 의견을 제공한다. 유엔안보리와 총회에서 선출하는 재판관은 15명으로 임기는 9년이다.

일본이 ICJ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한국은 지금까지도 단 한 명의 ICJ 재판관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안보리가 ICJ 재판관 선출에 관여하는만큼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중국을 비롯한 강대국 재판관이 뽑힐 확률이 높다. 문제는 우리와 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에서도 이미 한두 명의 ICJ 재판관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요즘 아시아와 남미의 개발도상국들을 상대로 사법제도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우리나라가 정작 ‘세계의 법정’에선 존재감이 전혀 없는 셈이다. 유엔해양법재판소에는 우리나라 재판관이 진출했지만, 국제분쟁을 다루는 ICJ 재판관 배출은 우리가 꼭 추진해야 할 숙제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국제법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

한·일간 7광구문제가 문제를 안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유엔에서는 7광구를 둘러싸고 한·중·일 대륙붕 권원(權原·권리를 얻는 원인이라는 의미의 법률용어) 전쟁이 전초전을 거치고 있다. 유엔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하는 ‘한계정보 공시’ 싸움이 그것이다.

협약 제76조 제8항은 “영해기선으로부터 200해리를 초과하는 대륙붕한계에 관한 정보는 당해 연안국이 대륙붕한계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며, 위원회는 대륙붕 외측한계의 획정사항을 연안국에게 권고하고, 그 권고를 기초로 연안국이 획정한 대륙붕 외측경계는 최종적이고 구속력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21명으로 구성되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는 1997년 6월 설립됐다. CLCS는 연안국이 제출하는 200해리 외측 대륙붕한계 관련 정보에 대해 과학적ㆍ기술적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해당국 간 분쟁이 있을 경우에는 심사를 진행하지 않으며, 이 경우에는 관련국들이 협상을 통해 경계를 정한다. 우리나라도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1997년 CLCS 초대 위원으로 선출된 후 5선에 성공(1997∼2020년 현재)했고, 위원회 의장(2017∼2022)을 역임하는 등 중책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위원이 있으며, 특이한 것은 위원들이 위원회의 권고결정권 보유는 물론 자국의 대륙붕한계정보 작성 시에도 깊이 관여 한다는 점이다.

1997년 이후 5연임 중인 박용안 유엔대륙붕한계위원회 위원.

유엔해양법 협약 제2부속서 ‘대륙붕한계위원회 규정’ 제4조에서는 유엔해양법 협약 발효(1994년 발효) 후 10년인 2004년까지 CLCS에 대륙붕 한계 정보자료를 제출토록 하였다. 그러나 CLCS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륙붕한계 조사의 시일 소요 등을 감안하여 정보제출 마감시기를 연장했다. 이에 따라 CLCS는 1999년부터 10년의 조사기간을 주어 2009년 5월 2일까지 예비정보를 제출하도록 요구했고, 예비정보를 낸 국가에 한해 2014년까지 본 정보를 제출하도록 권장했다.

2020년 10월 17일 현재 유엔해양법 사무국 자료에 따르면, 85개국이 200해리 초과하는 대륙붕에 대해 권원을 주장하고 있다(출처, 유엔해양법사무국, ‘유엔대륙붕한계위원회 자료제출’, 2020.10.17.).

일본은 2008년 11월 12일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7개 태평양해역의 대륙붕 한계 정보를 제출했다. CLCS는 일본이 2008년에 요청한 7개 해역 약 74만㎢ 중 4개 해역 31만㎢를 일본의 대륙붕으로 인정하는 권고를 내렸다. 오키노토리 북쪽 해역은 인정했고, 남쪽 해역은 오키노 토리시마가 섬이냐 바위냐의 논란으로 제외됐다. 우리가 주목하는 7광구 지역에 대해서 일본은 일본으로부터 자연 연장되는 대륙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CLCS에 한계정보 공시를 하지 않았다.

중국은 2012년12월 14일 7광구 까지 연장되는 동중국해 대륙붕 한계정보를 제출했다. 한국도 2012년 12월 26일 동중국해 7광구 해역 대륙붕 한계정보를 제출했다. 외교부와 해양수산부 당국자 등으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은 이날 동중국해에서 우리나라의 권원이 미치는 대륙붕 끝은 영토의 자연적 연장에 따라 오키나와 해구까지 뻗어나간다는 입장을 대륙붕한계위에 공식 설명했다. 이는 2009년 예비정보 제출 당시보다 대륙붕 외측경계선이 일본 쪽으로 38~125㎞까지 확장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한계정보는 2013년 8월 28일 CLCS에서 정식 문건으로 토의되었지만, 일본의 이의제기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CLCS에서 7광구 대륙붕은 한·중·일 삼국의 분쟁지역으로 부상되었다. 유엔해양법협약은 분쟁이 있는 경우 관련국들이 협상을 통해 경계를 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7광구 주변 대륙붕은 ‘자연연장이론’을 주장하는 점에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입장이다.

한편 한국과 일본은 1974년 《한·일 대륙붕공동개발협정》으로 공동의 개발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형성되어 있다. 일본이 2028 까지가 시효인 《한·일 대륙붕공동개발협정》을 마냥 무시하기만 하는 것은 중국과의 권원주장에서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다.

이 대목에서 초나라와 오나라가 막강한 위나라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적벽대전의 승리를 야기한 책략이 떠오른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침 소리가 커져가는 지금, 초나라 입장과 유사한 한국의 처지에서는 제갈공명 같은 탁월한 책략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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