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를 떠오르게 하는 배우였다.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감독 조석현, 제작 ㈜엠씨엠씨)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유호정은 단아했고 은은했다.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란 표현이 생각나게 할 만큼 완숙한 매력이 가득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청춘스타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십 편의 작품을 거치며 그렇게 ‘국민 누님’ ‘국민 엄마’로 성장해 있었다.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는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싱글맘 홍장미(유호정)와 딸 홍현아(채수빈)의 절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 아이돌 가수를 꿈꾸던 엄마 홍장미의 젊은 시절 첫사랑을 그릴 때는 경쾌한 코미디였다가 그 첫사랑의 결과로 미혼모가 된 홍장미가 생활고에 시달리며 아이를 꿋꿋이 키워나가며 희생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유호정은 베테랑답게 웃음과 감동을 관객에게 선사하며 농익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유호정은 영화 속 싱글맘 홍장미를 만나면서 어렵게 홀로 두 딸을 키운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동안 여러 엄마 역할을 연기했지만 그건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연기했어요.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 엄마가 날 키울 때 이랬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접근해 나갔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엄마가 생각나서 마음이 울컥했어요. 장미를 연기하면서 엄마가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그래서 그리 나에게 엄하게 구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시사회서 영화를 보니 ‘이건 엄마가 보셨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한테 쓰는 편지의 느낌이었죠. 요즘 어르신들 팔구십까지 장수하시는데 울 엄마는 뭐 그리 바쁘다고 그리 빨리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더 살아계셨다면 손자들 크는 것도 보고 내가 더 잘해드릴 기회도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영화를 본 후 자꾸 보고 싶더라고요.(눈물이 글썽이며 미소) 영화 속 장미의 삶은 사실 처절하지만 우리 영화는 그걸 밝고 희망적으로 그려나가요. 젊은 관객들이 부모님과 함께 보며 엄마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는 기회가 됐으면 정말 좋겠어요.”

유호정은 18살 된 아들과 15살 딸을 둔 두 아이의 엄마. 그 덕분인지 영화 속에서 딸 현아를 연기한 채수빈과 현실적이면서도 훈훈한 모녀 케미를 이뤄 관객들을 미소 짓게 한다. 옷을 몰래 입은 것 갖고 아웅다웅 싸우다가도 금세 드라마를 함께 보며 우는 모습은 극히 현실적이어서 큰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유호정은 채수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빈이는 정말 해맑고 성실하고 반듯한 친구였어요. 우리 딸이 수빈이처럼 컸으면 좋겠어요. 촬영 전 둘이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어떤 말을 하면 딱 알아듣고 즉각 반영하더라고요. 걱정할 부분이 전혀 없었어요. 영화를 보니 저랑 진짜 엄마 딸이 돼서 즐기고 있는 게 보여 기분이 좋았어요. 우리 가족 중 딸이 유일하게 시사회에 와서 영화를 봤는데 ‘어떻게 봤느냐’고 물으니 웃기고 재미있지만 엄마가 영화 속에서 너무 힘들어 하니까 슬펐다고 말해 웃었어요. 지금은 아직 어리니 자기가 커서 호강시켜 준다고 해 신통했어요.(웃음) 딸은 그 무섭다는 중학교 2학년이에요. 약간 예민해진 것 같지만 중2병이 오진 않았어요. 아직은 여전히 엄마랑 뽀뽀하자면 하는 귀여운 친구예요.”

‘그대 이름은 장미’는 대성공을 거둔 ‘써니’ 이후 8년 만의 영화. 수많은 제의가 있었지만 유호정은 미국에 유학 중인 두 자녀 뒷바라지하느라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그에게 모든 엄마들처럼 일과 육아를 균형 있게 병행하는 건 늘 어려운 숙제다.

“‘써니’는 지금 봐도 정말 재미있는 영화예요. 명절 때 우리 애들 보여줬는데 진짜 재미있게 보더라고요. ‘써니’ 이후 좋은 제안들이 많았지만 연이 닿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대 이름은 장미’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었어요.(웃음) 요즘은 엄마 역할을 잘하고 싶어 미국에 자주 가 있어요.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내 작품 모니터도 해주고 대화가 되는 친구가 됐어요. 그건 떠나 보내야 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일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보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추억을 많이 남겨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떠오르는 추억이 엄마의 김치 맛이에요.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많이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유호정은 현재 아이들 뒷바라지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그대 이름은 장미’처럼 마음을 끄는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한국에 돌아올 마음의 준비는 돼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해 배우의 길에 들어선 지 내년이면 30년. 적성에 안 맞아 초반에 그만둘 생각도 있었지만 동료배우인 남편 이재룡의 격려와 채찍질 덕분에 지금의 위치까지 와 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정말 복이에요. 데뷔 초반에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사람 관계가 힘들어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이 작품 하나만 더 해보고 다시 생각하라고 말했죠. 그렇게 권유한 것들이 잘되고 칭찬을 받게 됐어요.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하다 보니 삼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어요. 연기는 정말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한 번도 제 연기를 보며 만족한 적이 없어요. 저보다 몇 십 년을 더한 선생님들을 만나면 자신의 연기에 만족한 적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웃음) 차기작 계획은 없어요. 배우란 선택받아야 되는 직업이니 기다리고 있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 제공=리틀빅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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