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무공해 청정소녀였다. 영화 ‘증인’(감독 이한, 제작 ㈜무비락, ㈜도서관옆스튜디오)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향기는 어린 시절 누구나 본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하이디를 연상시켰다.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도 걷히게 할 것만 같은 맑은 눈동자의 소유자인 그는 온 몸에서 긍정 에너지와 해피 바이러스가 흘러넘쳤다.

영화 ‘증인’은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순호(정우성)가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와 교감하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담았다. 김향기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감각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지우 역을 담백하게 형상화하면서 관객들의 마음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어쩌면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캐릭터는 배우들이 연기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 김향기는 전형적인 행동의 특징에 집중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공감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잔잔하지만 기분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았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영화를 만나기 전 사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편견이 있었는데 지우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그 오해를 풀 수 있었어요.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친구들은 그들만의 특성이 각각 있어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죠. 특별하게 생각하기보다 다른 성격처럼 그 특성을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폐를 가진 친구들도 청소년기 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 깨닫는다고 해요. 매우 중요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죠. 그 힘든 시기에 지우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향기는 영화 속에서 정우성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 짓게 할 ‘꿀케미’를 선보인다. 어깨에 힘을 뺀 부드러운 남자 정우성과 아무도 밟지 않은 새 하얀 눈밭을 연상시키는 김향기의 연기 호흡은 스크린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세 살 때 출연한 CF에서 정우성과 이미 만난 김향기는 정우성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을 전했다.

“처음 출연을 결정했을 때 누가 순호 역을 연기할지 전혀 몰랐어요. 우성 삼촌 이야기를 듣고 매우 신기했고 기대가 됐어요. 이제까지 선배님이 해온 영화와 톤이 달라 어떻게 연기할지 정말 궁금하더라고요. 현장에서 제가 살가운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어요. 자연스럽게 연기 호흡을 맞추면서 친해졌어요. 제가 모니터 뒤에 앉아 있으면 먼저 다가와 말 걸어주시고 아재 개그도 해주셨어요. 우성 삼촌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에게 배려심의 아이콘이었어요. 그 덕분에 편하고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 삼촌의 이제까지와 다른 연기 정말 좋더라고요. 현장에서 보면 타고난 게 멋있는 분이세요.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가려는 선배님의 노력을 대중이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증인’의 연출을 맡은 이한 감독과는 이미 2014년 ‘우아한 거짓말’에서 호흡을 맞춰본 사이. 지우의 엄마를 연기한 장영남과는 네 번이나 모녀 호흡을 맞췄다. 김향기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두 사람은 현장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었다.

“감독님은 정말 한결 같으세요. 따뜻한 감성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여전하셨어요.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잘 잡아주시더라고요. 준비성이 철저하셔 모든 장면과 감정을 정확히 짚어주셨어요. ‘우아한 거짓말’ 때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지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감독님의 따뜻한 감성이 매 작품 유지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감독님께서 저를 믿고 모든 걸 맡겨주셨어요. 그 덕분에 큰 틀을 잡아놓고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연기했죠. 감독님이 표현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라고 허락해주셨어요. 장영남 선배님은 벌써 네 번째 제 엄마가 돼주셨는데 옆에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어요. 절 딸로 대하기보다 같은 연기자 동료로 대해주셔 정말 고마웠어요.”

올해 대학신입생이 되는 김향기의 나이는 올해 한국나이로 스물. 소녀에서 숙녀로 넘어가는 단계다. 최근 단막극 ‘좋맛탱:좋은 맛에 취하다’서 처음으로 로맨스 연기를 경험한 그는 올 봄 첫 미니시리즈 ‘열여덟의 순간’을 차기작으로 결정했다. 무려 2700만명을 모은 ‘신과 함께’ 시리즈의 엄청난 성공과 성인연기자로 넘어가는 단계인 만큼 고민도 많고 부담감이 클 법하다. 그러나 17년차 베테랑답게 김향기는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건 김향기를 언제나 믿고 지원해주는 부모님 덕분인 듯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현장을 따라다녔지만 자아가 형성된 후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어요. 작품이 들어와도 제 의향을 물어봤고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게 맞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1년에 한두 편 정도만 출연해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친구들과 자주 놀러 다니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어요. ‘증인’은 내 십대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지우란 캐릭터를 만들어가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이 영화를 통해 많이 성장한 느낌이에요. 우리 영화를 보면서 자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까지 바라지 않아요. 그보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마음이 열리면 자폐를 가진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요. 피하기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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