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귀국전... 3월15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명선(茗禪), 김정희, 115.2×57.8㎝ 족자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권동철

19세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활동했던 조선후기는 개항을 앞둔 봉건사회였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전통에서 현대로 대전환기의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소용돌이 선상에 놓인다. 그러한 때 전통적 미의식을 깨고 변화의 거대한 물결위에 승선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다.

힐난과 처절한 고독 속에서 자유로운 감성 그대로를 표출해낸 그를 현대서(書)의 출발로 보는 근거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추사 괴(怪)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추사 개인의 자의식의 발로다. 전통의 표상이자 사회적 약속인 문자구조를 필획(筆劃)의 굴신지의(屈伸之意)로 해체하면서 ‘이것은 글씨를 쓰기 위함이 아니다’고 선언하는 지점은 더 이상 전통으로서 집단 속에 머물러 있는 추사가 아니다”라고 해설한다. 이와 함께 “추사체는 특히 서체조형적인 측면에서 왕법(王法) 중심의 첩학(帖學)과 청조 금석고증학의 비학(碑學)을 혼융시켜 괴(怪)의 미학을 창출해낸 결정”으로 논평했다. 추사는 24세 연행(燕行)때 청조 학예계 거장인 78세 옹방강(翁方綱)과 47세 완원(阮元)으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두 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신 후 경학과 금석고증학, 서법을 연마하여 학예일치의 경지를 일생에 걸쳐 구축한다. 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천펑(沈鵬, 1931~)은 “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김정희의 서법(書法) 작품은 강렬한 반역적(反逆的) 성격, 특히 비(碑)로서 첩(帖)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불협조(不協調)의 성격은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김정희의 서법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강렬한 독립과 자주와 자강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갈파하고 있다. <천펑, 회통(會通)과 독창(獨創)의 종사(宗師):한국 서성(書聖) 김정희, 도록中>

(위)일로향각(一爐香閣), 김정희, 35.2×145.3×2㎝ 나무에 채색, 19세기. 통도사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이다. (아래)경수당(警修堂), 옹방강 서, 39×99㎝ 현판 과천시 추사박물관. 옹방강(1733~1818)이 자하 신위에게 써준 현액 글씨를 신위가 쌍구(雙鉤)로 모각(摹刻)한 현액. 예술의 전당

현대성 농후하게 담긴 현판

19세기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시류에서 이룩한 추사 글씨의 세계성과 현대적 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웨이산 중국미술관 관장은 추사의 현판을 두고 “현대성이 농후하게 담겨 있다”라고 설파했다. 또 일본의 추사 연구가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는 “조선 근세사상사에서 탁월한 경사(經師)로서 가장 이채를 띠고 있는 것은 김정희이다. 경학(經學), 금석(金石), 서도(西道), 사장(辭章), 천산(天算)에 걸쳐서 깊이 최고의 경지까지 들어갔다. 특히 청조문화에 정통하고 새로이 실사구시의 학(學)을 조선에 수립 선포한 위대한 공적에 이른 것은 전에 그런 사람도 없었고, 고금독보(古今獨步)라는 느낌이다”라고 썼다.<후지츠카 치카시 지음, 김현영(金炫榮) 해제번역, 동아시아의 문화교류(日^鮮^淸의 文化交流), 도록中> 한편 서(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를 끝으로 폐지된다. 식민지서구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서화동원(書畵同源)이 분리된 것이다. “동아시아 예술에 있어 전통의 요체인 서(書) 언어를 빼면 그림마저 그 토대가 무너짐은 물론 서구미술의 수용과 소화 재해석에 있어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함은 정작 현대미술이 더 잘 알고 있다”라는 이동국 수석큐레이터의 지적은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이번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귀국전은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대련,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 총 120여 점을 3월 15일까지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 서예박물관에서 성황리 전시 중이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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