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출신·종교 따지지 않고 인재 등용…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건설에 초석

국왕 대관식에서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인들에게‘엘리자베스 1세 여왕(재위기간 1558-1603년)’은 역대 어느 군주보다도 높은 찬미와 송덕의 대상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하 글에서는 ‘엘 여왕’으로 표기)은 새로운 밀레니엄 전환기에 전 세계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치지도자로 선정되었다. 영국을 ‘대영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이지만 그 원형을 마련한 지도자는 바로 엘 여왕이다. 파란만장한 삶이란 `파도의 물결치는 것이 만장(萬丈)의 길이나 된다’는 뜻으로, 삶에 변화가 극심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엘 여왕의 삶은 그 자체가 투쟁의 역사다. 탄생부터 후계과정을 둘러싼 치열한 궁정암투, 여왕 즉위, 반세기 간의 국가통합과 강국성장을 위한 탁월한 통치, 스페인,네덜란드 등 강대국과의 세계전쟁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엘 여왕에 관한 드라마는 21세기 지금까지도 소설과 드라마로 제작되고 인기를 끌고 있다. 2006년 영국 BBC가 제작한 ‘처녀여왕’, 영국의 채널 4가 제작한 ‘엘리자베스’ 등이 대표적이다. 2008년에 제작된 영화‘천일의 스캔들’은 부친 헨리 8세(재위기간 1509-1547년)와 앤 블린,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명민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다.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한 영국 종교개혁의 출발은 헨리 8세와 앤 블린의 결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궁녀 출신으로 두 번째 왕비가 된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인 앤 블린이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하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여성편력이 심하고 바람둥이인 헨리 8세 왕은 여섯 차례나 왕비를 바꾸었다. 헨리 8세는 1547년 엘리자베스가 열세 살 때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이복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약한 소년 왕 에드워드 6세의 6년간의 짧은 재위기간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 된 것은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 사이의 유일한 장녀이자 엘리자베스의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였다. 튜더왕조의 네 번째 왕이자 잉글랜드의 첫 번째 여왕인 메리 1세의 6년 재위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탑에 갇히기도 하였고 숱하게 고문과 감시를 당했으며 살해 위기를 겪기도 했다. 1558년 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유일한 후계자로 기적같이 살아남은 행운으로 엘리자베스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엘 여왕 즉위 초기의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왕권 다툼인 장미전쟁의 후유증에 허덕이고 있었다. 백년전쟁(1339-1453년)은 영국 왕이 프랑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기에 프랑스 왕위도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며 일으킨 전쟁이다. 백년전쟁에 이어 영국 왕위계승권을 놓고 장미전쟁(1455-1485년)이 발발했다.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한 랭커스터가와 흰 장미를 문장으로 한 요크가가 쟁패전을 벌렸기에 장미전쟁으로 불린다. 장미전쟁 끝에 랭커스터가를 이은 튜더가가 왕권을 잡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조부 헨리 7세, 부친 헨리 8세가 왕권을 이어갔던 것이다. 가난한 국민, 텅 빈 국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스페인의 노골적인 간섭, 자신을 반대하고 암살하려 한 반대파 귀족들, 스코틀랜드의 견제와 아일랜드의 이탈 움직임, 급격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자베스를 돕고 보좌할 참모진의 부재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엘 여왕 재위 반세기 만에 영국은 유럽의 최강자가 되었고, 마침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대영제국’ 완성의 첫 발을 내딛었다.

엘 여왕의 재위 45년간 역사에 기록된 국가경영전략의 주요핵심은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엘 여왕의 리더십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목표, 그것을 실천하는 유연한 방법론’이다. 빠른 결론이나 전시성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정책의 실행 과정이 합의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신하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모두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데 집중했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 문제였다. 엘리자베스여왕은 개신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을 취함으로써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하였다. 전임 여왕 메리1세는 어머니의 종교였던 로마 가톨릭교를 부활시켰으며, 수많은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여 ‘피의 메리’라고도 불렸었다. 엘 여왕이 종교 정책은 이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엘 여왕은 “나는 신교도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것이 또 다른 피의 숙청과 갈등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종교의 맹신에서 오는 극단성을 혐오했다. 그녀는 영국 성공회의 수장직 수락을 요구받자 ‘수장’이 아닌 ‘수석 관리자’라고 표현하는 유연성을 발휘함으로써 구교도의 반발을 완화시켰다. 또한 성공회의 정착을 통해 로마 교황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여유를 갖고 종교 문제에 대처했다. 엘 여왕은『수장령 Acts of Supremacy』(국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 최고의 수장으로 규정한 법률) 과『통일령 Act of Uniformity』(국교회의 예배와 기도·의식 등을 통일한 법률)을 제정하여 종교 질서를 확립했고, 신교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둘째,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계급.출신.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단 하나의 기준, 즉 `영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라는 원칙만을 적용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같은 해적 출신에게 영국 해군의 지휘를 맡겼고, 그에게 기사 작위를 줬다. 드레이크의 성공사례는 많은 영국인들이 대양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혹자는 ‘영국 귀족의 피는 푸르다(blue blood)’고 하는 말도 해양력이 강했던 엘 여왕 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한번 신임해 등용하면 작은 실수, 실패를 용서하면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다. 엘 여왕의 해적해군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그녀는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 단호했지만 병사들을 아낀다는 느낌을 주는데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셋째, 아메리카.인도.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건설해 자원을 획득하면서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먼들었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국제 무역과 해외시장 개척했다. 넷째, 통화개혁을 통해 가격혁명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상쇄했다. 다섯째, 가난한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구빈법』을 제정했다. 귀족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유연하고 우아한 방법을 동원해 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결론적으로 엘 여왕의 리더십에서 중요한 부분은 항상 미래를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정치, 종교, 사회 및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의 모든 목표는 현재보다 나은 영국을 만드는 것에 두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원한보다는 현재를 직시했고, 미래를 향해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열린 사고를 몸소 실천했다.

유럽근세사를 보면 피지배국가의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해양력을 키움으로써 세계 패권국가가 되는 패턴이 보인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이 그랬다. 영국 역시 기원 후 43년부터 5세기까지 로마는 물론 바이킹 족에 의해 공격 당했고, 일부지역은 지배를 당했다. 특히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살던 노르망디 윌리엄 공에 굴복한 이후 300여 년 간 외세의 지배를 겪었다. 대영제국의 출발은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엘 여왕은 잉글랜드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렸으며,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했다. 엘 여왕이 명군주로서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갖추게 된 것은 부친 헨리 8세의 교육 덕이다.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 때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녀 스스로도 “그리스, 로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뛰어 넘겠다”는 당찬 기개를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를 자유롭게 쓰고 읽고 대화할 수 있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세 시간씩 역사책을 읽었다. 자신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학자는 거의 없다고 자부했으며 죽는 날까지 고대 로마의 키케로나 고대 그리스의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소일거리로 삼았다. 그녀는 학문을 사랑한 학자였던 것이다. 엘 여왕은 여왕즉위식 날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꼈고, 잉글랜드 왕실에서 내려오는 왕관을 씀으로써 여왕으로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결혼과 종교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제인 결혼에 관해 그녀는 “한 시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평생 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석을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처녀 여왕’의 전설을 만들었고, 최대한 활용했다. 그 이유 때문에도 숭배의 대상이 됐으니 말이다. 정략결혼이 판치던 당시 유럽에서 엘 여왕에 대한 혼담 제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오스트리아의 찰스 공, 프랑스의 앙주 공, 스웨덴의 에릭 14세, 러시아의 이반 대제 등 유럽 여러 명문가에서 구혼이 들어왔지만 엘 여왕은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시간을 끌었다. 혼담은 모두 흐지부지됐다. 엘 여왕의 이런 솜씨를 당시는 ‘페넬로페의 뜨개질’(온종일 뜨개질한 것을 밤이면 도로 풀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뜨개질을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월터 롤리경, 에섹스 백작은 물론 평생의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도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모친과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토마스 시모어가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머스 시모어는 에드워드 6세의 후견인인 에드워드 시모어 공작의 동생으로 해군 장교였으며, 소문난 바람둥이에 음험하고 위험한 야심가였다. 종교문제는 앞서 엘 여왕의 국가경영전략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갈음한다. 엘 여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 ‘처녀 여왕 The Virgin Queen’이라 불렸으며,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로 민심을 얻었다. 엘 여왕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지성과 위엄을 갖춘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성적 매력과 자신감으로 남성들을 뇌쇄시켰다. 승마와 사냥,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춤을 좋아했다. 노년에도 목이 깊게 팬 드레스를 입었고, 하루 일과를 몸치장을 하는 데 두 시간씩을 쓰면서 시작했다. 온 몸을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치장했다.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단연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유럽의 최고 재벌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을 좌지우지했던 야고프 푸거의 목걸이는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의 목에 걸렸다. 그녀는 보석마다 좌우명인 ‘셈페르 에어뎀 semper eadem(항상 같다)’문구를 새겼다.(출처. 앨리슨 위어 저/ 하연희 역,《엘리자베스 1세》, 루비박스, 2007) 170cm이 넘는 훤칠한 키에 `감탄할만한 미모’를 지녔던 엘리자베스도 말년에는 식민지에서 들여온 사탕과 초콜릿, 담배 등을 너무 즐겨서 치아 대부분이 빠졌다고 한다.

영국의 신대륙 탐험은 죠반니 카보토 Giovanni Caboto (영어식 이름 John Cabot, 1450-1499)를 통해 시작됐다. 카보토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이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해양탐험가이며, 콜럼버스와 동시대 인물이다. 콜럼버스가 서방 항로 개척에 나섰을 때 카보토는 북방 항로 개척을 통해 신대륙을 발견하려 했다. 역사의 가정이지만 카보토도 서방항로를 개척했다면 인류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카보토는 위도가 높을수록 동양으로 가는 항해거리가 짧아질 것으로 믿었기에 영국의 브리스톨 항은 그의 항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1496년 헨리 7세의 지원에 힘있어 카보토 1497년 북미대륙 북부지역인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 쪽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죠반니 카보토의 아들인 세바스챤 카보토가 1508년과 1509년에 북미대륙의 허드슨 만과 체사피크 만을 탐사한 후 귀국했지만, 헨리 7세 다음 왕권을 받은 헨리 8세는 해외탐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달랐다. 해외 원정에 국력을 쏟아 붓는 탐험과 모험의 시대를 전개했다. 엘 여왕의 대표적인 해양참모는 두 사람이다. 오른 팔 역할은 해군을 키우면서 최초로 해외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했던 월터 롤리 경이었고, 왼팔 역할은 해적출신으로서 세계 항해를 경험했고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라 할 수 있다. 미국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있어서는 월터 롤리, 험프리 길버트, 그리고 리처드 그렌빌이 앞장섰다. 월터 롤리는 “바다를 장악하는 자, 무역을 장악 한다. 세계의 무역을 장악하는 자, 세계의 부를 장악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세계 그 자체를 제패할 것이다”라는 역사에서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엘리자베스 1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해양 전략가이자 해양탐험가 월터 롤리 경이었다는 설이 있다. 험프리 길버트는 1583년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여 이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은 길버트의 동생인 월터 롤리가 수행했다. 1584년 롤리는 식민지를 찾기 위해 두 척의 배를 이끌고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어노우크 섬에 도착했다. 롤리는 이 땅을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를 기념하여 ‘버지니아 Virginia’라 명명했고, 이듬해에 사촌인 리처드 그렌빌을 대장으로 하는 100명의 영국인을 식민지에 파견했다. 엘 여왕 후임인 제임스 1세는 1606년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에 식민지 개척과 관리에 관한 특허를 내줬다. 1607년, 회사가 보낸 식민지 주민들은 제임스타운에 첫 영구적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엘 여왕시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다양해졌다. 한 예로 ‘한자동맹’이 쇠퇴함에 따라 영국 상인들은 오랫동안 봉쇄되었던 발트 해로 다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1579년 북동부 독일로 직물을 수출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무역도 재개했다. 잉글랜드 상인들은 또 남대서양으로의 진출도 도모하였다. 런던 상인들이 파견한 탐험대는 1591년과 1596년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아 쪽을 탐험하여 교역 가능성을 탐색했다. 그 결과 1600년에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EIC)’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영국 역사상 최대의 무역회사가 되었다. 이처럼 영국을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참고로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는 우리나라 해양수산계가 가장 많이 쓰는 구호다. 이 구호가 현실화되는 날을 기대한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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