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빈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처절한 주부 미란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장겨울이었을 줄이야. 여배우의 능란한 변신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변신을 넘어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배우 (34)과 만났다 .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에서 평범한 듯 특별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20년지기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지난달 28일 방송된 최종회는 케이블, IPTV, 위성을 통합한 유료플랫폼에서 가구 평균 14.1%, 최고 16.3%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전국기준/닐슨코리아 제공)

은 외과 유일무이 레지던트 장겨울 역을 연기했다. 여름엔 흰 티셔츠, 겨울엔 청남방 두 벌로 1년을 버티는 ‘단벌신사’이지만 교수들 눈엔 예쁘기만 한 외과의 희망이다. “전체적으로 예쁘게 보일 이유가 없는 캐릭터였어요. 전공의로서 늘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했죠. 외형부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실용적인 옷만 입고, 머리 묶을 때도 스프링 고무줄을 사용했는데 너무 대충 입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더라고요. 의도한 바였기 때문에 좋았죠. 청남방, 티셔츠는 남성복이었어요. 흰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온 20~30벌 중 10벌 정도 입어보고 고른 것이고요. 메이크업은 베이스만 가볍게 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 립밤도 안 발랐어요. 튀는 것보다 장겨울답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은 지쳐 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하고 초롱초롱한 레지던트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며 ‘실제 의사 같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지인들이 장겨울이랑 되게 비슷하다더라”며 웃었다. “저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단호한 면도 있어요. 좋아하는 일엔 열정적인데 아니면 진짜 무관심하고요. 또 무슨 일이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에요. 연애 면에서는 겨울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해본 기억이 오래전이기도 하고, 용기내본 적도 없었던 것 같거든요. 겨울의 풋풋한 감정이 예쁘게 느껴졌어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99학번 의대 동기 5인방을 중심으로 그들과 얽혀 있는 가족, 연인, 동료들의 에피소드를 탄탄한 곁가지로 삼아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만큼 어떤 드라마보다 많은 캐릭터가 등장했고, 이들 각자의 사연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났다. 특히 겨울은 익준(조정석)과의 ‘부녀 케미’로 사랑받았다. 전공의가 한 명뿐인 일반 외과에서 수많은 교수의 애정을 받는 겨울에게 구애하는 익준의 모습은 매번 웃음을 선사했다.

“조정석 선배가 실제로도 따뜻한 분이라 촬영도 즐거웠어요. 농담처럼 ‘아버지’라고 부르면 선배는 ‘그래 딸아’ 하셨죠. 다만 겨울이 ‘웃지 않는 캐릭터’라는 설정 때문에 힘들었어요. 익준이 ‘픽미’ 춤을 추는 장면이 첫 촬영이었거든요. 정석 선배 춤을 보면서 ‘이걸 내가 무표정으로 견뎌야 하는구나’ 싶었죠. 물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고비들이 있었고요.(웃음) 겨울이가 웃음이 없다기보다 익준의 유머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유머의 결이 서로 안 맞는달까. 리허설 때 실컷 웃고 촬영엔 무표정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익준과의 에피소드만큼 사랑받은 건 정원(유연석)과의 러브라인이었다. 연애 숙맥인 겨울은 짝사랑하는 정원의 마음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마지막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면서 이번 시즌 유일한 커플 탄생을 알렸다. 일각에서는 ‘철벽남’이었던 정원이 겨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점이 모호하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은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보통 사랑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잖아요.극에서는 언제, 어떻게, 왜, 바로 그 순간을 딱 짚어서 보여주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느꼈어요. 정원-겨울이 한 공간에 있는데도 마주보지 않고 시선이 엇갈리는 장면들, 그런 게 둘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보여준 것 같고요. 물론 겨울에 비해 정원의 감정선이 쉽게 보이진 않았지만 섬세하고 명확했다고 봐요. 특히 연석 선배의 섬세한 연기 덕에 저도 자연스럽게 이입했어요.”

올해는 에게 조금은 특별한 해다. 영화 ‘방가? 방가!’ 이후 데뷔 10년차를 맞았기 때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20대 중반에 연기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꼬박 10년을 쏟았고 최근 KBS 2TV ‘추리의 여왕’, 영화 ‘변산’, ‘클로젯’,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등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리고 데뷔 10년차에 만난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마침내 도약했다. 은 “10년? 원래 그런 것에 큰 의미를 안 둔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마지막까지 장겨울처럼 쿨한 모습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불안하고 예민하게 보낸 시간이 꽤나 길었어요. 그런 시기를 지나 이제야 평화로워졌죠. 그러면서 그냥 삶의 매순간에 더 의미를 두게 됐어요. 그림 공부를 오래했는데 저한테 재능도 열정도 없다는 생각에 좌절했었거든요. 그러다 적어도 좋아하는 일을 한번은 해봐야 하지 않나 싶어 연기를 시작했고요. 연기는 저를 기쁘게도 하고 괴롭게도 해요. 또 잘하고 싶고 궁금하고, 계속 해내고 싶게 자극해요.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을 만난 건 참 행운이죠. 저는 앞으로도 똑같을 것 같아요. 주어지는 상황에 맞게, 다만 새로운 캐릭터로 나타나고 싶어요.”

조은애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최성현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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