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만 4번’ 바람둥이... 촬영장선 위압적

찰리 채플린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사운드트랙 작곡가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 월워스 태생. 1977년 12월 스위스 보드 주 버베이 사망. 향년 88세.

칫솔처럼 삐져나온 콧수염, 중절 모자, 대나무 지팡이, 우스꽝스러운 발걸음 등을 특징으로 한 ‘작은 방랑자’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워 할리우드 초창기 중추적 역할을 해낸 스타이다. 18살 때 프레드 카노가 이끌던 보더빌 극단 멤버로 합류해 1910년대 미국 순회 공연에 참여한다. 1913년 12월 키스톤 스튜디오 소속 감독 맥 세네트와 전속 계약을 맺고 뉴욕 등지에서 무대 공연을 갖는다. 1915년 샌 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 ‘참가자들에게 제대로 된 코믹 연기를 펼쳐 주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정체를 숨기고 출전했지만 결승전에도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는 수모(?)를 당한다. 1919년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메리 픽포드, D. W. 그리피스와 의기투합해 UA 영화사를 출범시킨다. 배우로는 첫 번째로 시사 주간지 타임 1925년 7월 6일자 커버 인물로 선정된다. 신문 삽화가 에드 카리는 찰리 채플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입된 사위>(1916)를 연재한다. 이것은 생존해 있는 영화인을 모델로 한 최초 만화로 기록되고 있다. 중년 남자가 어린 소녀에게 성적 호감을 드러내는 것이 ‘로리타 콤플렉스’. 채플린은 4번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 법칙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1918년 첫 결혼 당시 신부 밀드레드 해리스는 불과 17세, 채플린은 29세였다. 두 사람은 3년만에 파경을 맞게 된다. 2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대표 소설 ‘로리타’의 모델로 알려진 인물. 1924년 11월 결혼 당시 그녀는 16세, 채플린은 35세였다.

‘만나자 마자 황홀경을 느끼게 했다’는 그녀와의 관계도 이혼 소송을 거쳐 3년만에 결별하고 만다. 3번째 부인 폴레트 고다드가 26세때 채플린은 47세. 4번째 부인 우나 오닐은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1943년 결혼 당시 우나는 17세, 채플린은 무려 54세였다. 10대였던 우나는 오손 웰스와 <호밀 밭의 파수꾼>으로 알려진 제롬 D. 셀린저와 동거 관계를 했을 정도로 조숙했던 여성으로 알려진다. 20대 시절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그는 수많은 여성 편력이 오점이 되고 있다. 조강지처 사이에 1명, 리타 그레이 사이에 2명 오나 채플린과 사이에는 무려 8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천재 코믹 배우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그가 유대인이라고 오해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는 후문. 히틀러는 채플린이 유독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콧수염 때문이라는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모던 타임즈>는 현대화된 산업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단순 부품처럼 노역을 강요당한다는 메시지를 제시해 친노조 성향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와중에 구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정치 성향을 밝히는 동시에 <모던 타임스>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성을 꼬집는 등 좌파주의 성향으로 인해 1950년대 미국 정치, 사회를 강타했던 공산주의자 척결 운동인 매카시즘 추종자들로부터 곧바로 공격을 받는다. 급기야 1952년 유럽 여행을 떠난 것을 기회로 미국에 대한 재입국 금지 조치를 당해 스위스에 정착하게 된다.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거나 냉혹한 자본주의에 비판의 화살을 보내고 독재 행위를 비난하는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통해 환대를 받아냈다.

하지만 의복, 신발 등을 오랫동안 착용하고 다니는 등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으로 몸에서 늘 악취를 풍겨 영화계 인사들로부터는 끔찍함을 던져 주었다고 알려졌다. 이혼을 앞두고 있는 홍콩 갑부 오덴(말런 브랜도)가 대서양 횡단 여행 도중 미모의 여성 나타샤(소피아 로렌)을 만나 연정 사연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 말년 작품에서 말런 브랜도와 의기투합했지만 연출 방식을 놓고 갈등을 벌여 끝까지 화해를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촬영 시간에 늦을 경우 모든 연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주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심지어 말런 브랜도는 자서전을 통해 ‘채플린은 내가 만난 가장 가학적인 남자’라는 인물평을 한다. 안하무인 독재자, 상대방의 체면과 감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위압적인 태도가 촬영장에서 접할 수 있는 채플린의 일상적 모습이었지만 고무, 털실 모자 등에는 원초적인 두려운 감정을 드러냈다고. 원하지 않은 임신을 시켜 많은 여성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던 것도 고무로 제조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초한 일이라는 쑤군거림을 들었다. 1947년 9월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반미활동위원회(HUAC)’로부터 3번의 소환장을 받는다. 이에 채플린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평생 어떤 정치적 단체에 관여한 적이 없다’는 답장을 보내자 결국 소환 결정은 흐지부지된다.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 기법을 시도했던 <전함 포템킨>(1925)을 최고의 명화라고 추천했다.

1960년대 사이키델릭 밴드로 명성을 얻었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드러머 스펜서 드라이덴은 한동안 자신을 우습게 볼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찰리 채플린이 삼촌이라는 혈연 관계를 숨겨온다. 암살 당할지 모른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 잡혀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팬 사인회 등에 참석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우리 시대 영화 예술 역사에서 셀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는 찬사와 함께 ‘명예상’을 수여 받는다. 이때 무려 12분 동안의 기립 박수를 받는다. <록키>(1976)는 그가 타계 직전에 가장 흥미 있게 관람한 영화로 꼽고 있다. 1978년 3월 3일 ‘코르시아-수르-베베 묘지’에 안장된 시신이 도난 당하는 수난을 겪다 5월 18일 경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찾아 재매장 되는 곤욕을 치른다.

그가 작곡한 ‘Smile’ ‘This Is My Song’은 영화 잡지 프리미어 선정 ‘불멸의 영화 주제곡 500’ 명단에 선정된다. 리하르트 바그너를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언급했다. 채플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방랑자’는 단편 <키드 오토 레이스 엣 베니스>(1914)에서부터 걸작 <위대한 독재자>(1940)까지 26년 동안 70여편의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해 영화 팬들의 환대를 받아낸다. 세르비아 수도 벨그라드에는 ‘찰리 채플린 거리’가 조성됐다. 중절 모자와 지팡이는 1987년 경매장을 통해 15만 달러에 낙찰된다. 2005년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된 골든 카메라 어워드 시상식장에 참석한 제랄딘 채플린은 부친이 작고 직전까지도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의 출연 영화를 TV로 시청하면서 ‘저 녀석 아주 웃겨!’라며 즐거워 했다는 일화를 공개한다.

이경기(영화칼럼니스트) www.dailyost.com

● 감독 명언^명대사

‘공원’ ‘경찰’ ‘어린 소녀’만 있으면 ‘코미디 ’ 한편은 너끈히 만들 수 있다.

영화 티켓을 구입하는 순간 그대는 또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영화는 변덕쟁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펼쳐 보이는 진실된 연기를 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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