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해양영토, 중국보다 8배나 넓어… ‘경제적 가치 부각’ 러·中과 열도분쟁

일본 북해도.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꿈꾼 마데이라제도의 그때와 지금

현대사에서 세계전쟁의 속성은 크게 세 가지로 경제전쟁, 자원전쟁, 또는 영토전쟁으로 대별할 수 있다. 세 가지 속성 모두가 합쳐진 전쟁이 ‘해양전쟁’이다. 특히 해양영토전쟁은 역사전쟁과 도서전쟁을 내포하고 있어 그만큼 복잡 미묘하고, 국가전략을 수립하기가 어렵다. 해양전쟁의 요소인 도서와 섬은 대양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서뿐만 아니라, 해외영토 확장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같은 해양강국들은 일찍부터 도서와 제도에 대한 야망과 지배욕을 표출해왔다. 여러 개로 구성된 도서(Islands)와 관련하여 ‘제도’, ‘군도’, ‘열도’ 등 표현이 있다. ‘제도’는 보통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로 하와이제도, 솔로몬제도, 포클랜드 제도 등이 있다. ‘군도’는 육지와 근접한 섬들로 고군산군도, 흑산군도, 연평군도 등이 있다. ‘열도’는 줄을 지어 서있는 일련의 섬들로 일본열도, 알류샨열도 등이 대표적이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도서 개척과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자 콜럼버스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포르투갈은 리스본에서 1000여㎞ 떨어진 대서양 남단과 아프리카 근해에 위치한 마데이라 제도(1420년)와 아조레스 제도(1427년)를 차례로 점령하고, 경제영토와 원양항로 개척의 보급기지로 만든 후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항로를 개척했다. 마데이라제도는 엔히크 항해왕자의 탁월한 책략으로 사탕수수 생산과 포도생산을 시작했으며, 1480년대에 들면서 큰 이익을 낳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농장의 성공은 시칠리아의 기술고문과 제노바 자본이 투자된 결과였다. 1470년대부터 제노바 상인의 대리인으로서 마데이라제도의 포르투 산투 섬을 설탕 구매를 위해 방문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섬의 초대 총독 바르톨로메오 펠레스토렐로의 딸 펠리파와 결혼하였고, 1480년대 이후 그 섬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는 사업을 구상했다. 역사의 가정이지만,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제도가 없었다면 막대한 항로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장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없었을 것이다. 15세기의 대항해시대 때만을 감안해도 대단했지만 현재도 마찬가지다. 아조레스제도는 95만㎢의 EEZ(배타적 경제 수역 Exclusive Economic Zone), 마 데이라제도는 45만㎢의 EEZ를 갖고 있어 이 두 섬의 EEZ 해역만으로도 포르투갈 육지면적의 50배 크기를 공여하고 있음은 섬의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페인은 지중해에 위치한 발레아레스제도를 그리스와 이탈리아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13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쟁패전을 벌였던 카나리아제도를 1496년에 점령했다. 카나리아 제도는 콜럼버스의 신대륙탐험의 첫 번째 출항지였고, 신대륙 탐사를 위한 베이스캠프였다. 카나리아 제도에서도 1484년 이후 제노바 상인이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였다. 사탕수수의 생산에는 약산성의 토양, 온난한 기후, 연간 1500~1800㎜의 강수량이 필요하였는데, 카나리아 제도는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도 아프리카 연안의 베르데 곶 제도에서 대규모로 데려올 수 있었다. 카나리아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보유했던 제노바의 상인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의 재정적 후원자들이었다.(출처, 미야자키 마사카츠, 《해도의 세계사》, 어문학사, 2017)

콜럼버스가 출항한 곳이 카나리아 제도였던 것도 해류를 이용한 항해술이 뛰어난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설탕농장 사업과 무역을 하던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주변해역의 물길을 잘 알았기 때문에 카나리아 해류를 타고 남서쪽으로 가서 대서양 북적도 해류를 만나 비교적 순탄하게 서인도 제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서인도 제도 쪽에서는 멕시코 만류를 타고 동진하다가 유럽 대륙 연안 쪽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카나리아 해류를 만나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콜럼버스는 서쪽을 가로막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 쪽을 최단 거리로 직행하는 해류를 탔고,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해류를 만나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카나리아 제도는 유럽연합(EU)에서 최남단 주변지역으로 분류되며 무역, 금융, 기술 이전, 남북 간 서비스 교환의 최적지이다. 특히 2억 5000만 명의 서아프리카 시장에 접근하려는 각국 회사들에게는 이상적인 기지가 되고 있다. 카나리아제도의 중심이자 한때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 호황을 누렸던 라스팔마스 항구는 전 세계 380개 항구와 연결되어 있다. 매년 50만 톤의 냉동어류를 가공 처리하는 라스팔마스는 서부 아프리카지역에서 제1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는 항만이며, 연간 1500만 TEU를 처리한다.


도서와 EEZ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은 해양의 평화적 이용, 해양자원의 형평하고 효율적 이용, 해양환경 보존 및 보호뿐 아니라 전쟁을 예방하고, 해양 분쟁 발생할 경우 타결의 규범을 정한 바다헌장이다. 유엔회원국 193개국 중 2019년 9월 4일 현재 비준국은 168개국이며, 이 중 EEZ 선포국가는 151개국이다(출처. Wikipedia). EEZ는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해서 설정되는 경제적인 주권이 미치는 해역이다. 연안국은 유엔 해양법 협약에 근거한 국내법을 제정함으로써 자국의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약 370km)의 범위 내의 수산자원 및 광물자원 등의 탐사와 개발에 관한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대신 자원의 관리나 해양 오염 방지의 의무를 진다.

EEZ 설정 기준선과 범위에서 도서의 존재는 중요하다. 유엔해양법협약 제 121조 1항은 ‘도서라 함은 자연히 형성된 육지로서 물에 둘러싸여 밀물 때에도 수면위에 있는 것’으로 물리적 형태를 규정하고 있고, 제3항에서는‘인간의 주거 및 독자적인 경제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암석은 EEZ와 대륙붕을 가질 수 없다’고 법적 성격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협약 제60조 8항에서는 도서와는 다른 ‘인공도서 및 구조물은 도서의 법적 지위인 영해, EEZ, 대륙붕을 가질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인도서의 존재에 따라 엄청난 면적의 EEZ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유엔해양법 협약은 비교적 자세히 명문화하고 있지만, 유인도와 무인도를 구분하는 정확한 기준은 마련돼 있지 않아 분쟁 시 해석과 다툼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유엔해양법 협약의 취약점을 버젓하게 이용하는 국가들에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이 속해 있다는 점이 우리의 고민이다.

전 세계 EEZ는 전해양의 36%이지만, 해저석유의 90%, 세계 수산물의 96% 생산을 하는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은 해역이다. 나라의 영역을 영해나 EEZ를 포함시키지 않은 순수한 육지의 넓이, 즉 영토의 면적만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육지 영토와 마찬가지로 해양영토는 영공을 관할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육지 면적만을 보고 좁은 섬나라 일본, 광활한 대륙의 나라 중국이라 부른다. 그러나 유엔해양법 사무국 보고서와 세계 EEZ지도를 살펴보면 일본의 땅은 중국의 땅에 비해 좁지만, 태평양으로 펼쳐진 섬나라 일본의 바다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넓다. EEZ 면적과 육지영토를 비교해보면 일본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37.7만㎢이나 EEZ 면적은 육지영토면적의 11배가 넘는 약 448만㎢나 된다. 반면 중국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960만㎢이나 EEZ 면적은 육지면적의 11분의 1에 못 미치는 약 88만 ㎢에 불과하다. 일본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의 오키나와와 센카쿠를 포함하고 있는 류큐 해역까지의 길고 긴 일본열도의 해안선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 본토 서해안보다 더 길다.

전 세계적으로 213개국이 EEZ나 영해 등의 해양경계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이웃 국가 간 해양경계가 중첩되는 경우가 많아 세계적으로 845개의 경계분쟁지역이 있으며, 해마다 해양경계 분쟁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국가 간의 도서 분쟁은 대부분 복잡한 지배-피지배의 과거 역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도서문제만 나오면 해당국가의 국민들의 적대적 감정이 휘발유처럼 불붙고, 정치지도자들은 여론에 편승하거나 또는 밀려서 문제해결에 어려움을 겪는다. 섬나라인 일본은 러시아와는 쿠릴열도 북방 4개 도서, 중국과는 센카쿠열도로 해양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도서책략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쳐, 치밀하고 치열하게 추진되어왔다.


쿠릴열도 북방 4개 도서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와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를 잇는 쿠릴열도는 총연장 약 1300km에 걸쳐 약 5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영유권 분쟁이 있는 곳은 남쿠릴 열도의 도서 중 최남단의 2개 섬과 홋카이도 북쪽의 2개 섬이다. 일·러 최초의 국경협정인 1855년 2월 러·일 통상우호조약 이후 북방 4개 도서(면적은 오키나와 현의 약 2배)는 일본 영토가 되었다. 1875년 일·러 쿠릴 및 사할린 교환조약 체결로 당시 양국이 공동 관리하던 사할린이 러시아에 양도되었고, 그 대신 일본은 쿠릴열도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905년 러·일 전쟁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끈 일본 해군이 대마도해전에서 발틱 함대에 승리한 후 일본은 사할린 남부지역 일부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돌아 1905년 러·일전쟁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이 40년 후 1945년 러시아에 굴복하는 패전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얄타협정에서 소련은 참전조건으로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남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양도를 보장받게 되었고, 특히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소련은 쿠릴열도 남단의 2개 섬인 에토로후(러시아 이름은 에토노프)와 구나시리(러시아 이름 쿠나시리)는 물론, 쿠릴열도와 상관없는 하보마이 제도(7개 제도로 구성)와 시코탄을 점유하게 되면서 일·러 간 도서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1956년 9월 일·소 공동선언 시 소련은 하보마이와 시코탄의 일본 반환 가능성을 시사했으나, 냉전기간 중 일본은 군사적으로 소련과 대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인 대소 봉쇄전략의 핵심 국가였기 때문에 양측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남쿠릴 열도 4개 도서 분쟁이 냉전 종식 이후 해결조짐을 보이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국력 약화로 인한 대외 선린외교 및 지역 안정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분쟁 해결 시 러시아에 대한 경제지원 가능성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으나 러시아는 극동 및 기타 지역의 분리 움직임에 대한 모스크바의 통제 필요성, 동 도서의 전략적 가치 등 상당한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간 논의된 현실적인 방안은 양측의 견해 차이가 적은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기타 2개 섬인 에토노프, 쿠나시리는 차후에 해결하는 방안이다.

러시아로서는 냉전시보다 상대적으로 저하된 쿠릴열도의 전략적 가치를 감안해 조건만 맞으면 양도도 가능하며, 러시아의 극동 에너지 개발투자 등과 관련해 투자능력이 있는 일본의 제안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재점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2012년 이래 일본 아베 신조 수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총 20회 정상회담을 하면서 북방 4개 도서 문제 해결을 모색하였으나, 실질적 성과가 없었으며, 러시아는 “북방 4개 도서는 러시아의 국가주권으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일본 북단 홋카이도 섬과 불과 20km 떨어진 북방 4개 도서 중 쿠나시리 섬과 에토노프 섬에 해군함정, 대공포, 전차 그리고 대공방어 부대를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뉴스레터 제433호, 20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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