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 제치고 해양패권 거머줬지만 산업혁명 대열에 뒤처지며 英에 패권 내줘

네덜란드의 튤립 화원.

경제학의 오래된 패러독스(역설)로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국가 간의 전쟁이든, 기업 간의 국제상전이든, 여·야 간의 선거전이든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승리를 위하여 과도한 비용을 치름으로써 위험에 빠지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상황을 뜻한다. 이 용어는 미국의 종합석유회사인 애틀랜틱 리치필드 회사에서 근무한 카펜, 클랩, 캠벨 등 세 명의 엔지니어가 1971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행동경제학자인 미국 시카고대학교 리처드 탈러 교수의 저서 <승자의 저주 The Winner’s Curse, 1992>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물론 역사에서 ‘승자의 저주’는 흔하다. ‘승자의 저주’와 연관된 용어로 ‘피로스의 승리’, ‘파비우스의 승리’ 등이 있다.

그리스의 북서부에 위치했던 작지만 강한 나라 에피루스의 피로스 Pyrrhus 왕 (BC319-272)은 최고의 전략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을 정벌하여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피로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고,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의 과실에 비해 피로스 측의 손실이 너무 많았다.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승리를 이룬 경우, 즉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 승리로 승화시키지 못한 경우를 '피로스의 승리 Phyrric Victory'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파비우스의 승리 Fabius Victory’이다.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뜻한다. 파비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구전 전략을 사용하여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으로부터 로마를 지킨 로마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os Fabius Maximus, BC 275-203)를 가리킨다. '피로스의 승리'는 ‘전투에서는 이기되 전쟁에서는 지는 셈'이고 '파비우스의 승리'는 '전투에서는 지되 전쟁에서 이기는 셈'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세계해양 패권국가가 된 네덜란드는 스스로 성공에 도취되는 바람에 ‘승자의 저주’에 빠져 18세기 산업혁명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 지위도 잃었다. 여기에는 현실에 안주하는 안일한 자세도 한몫 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전쟁경비를 과도하게 지출한 탓도 컸다. 무역과 해운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상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구입하면서 점차 귀족화의 과정을 밟았다. 결과적으로 암스테르담은 점점 화려했던 베네치아의 모습을 닮아 갔다. 이와 동시에 네덜란드는 제조업 없이 컸던 스페인의 전철을 밟았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양곡과 목재, 철 등 원자재를 다른 나라로부터 전량 수입했다. 본토에서 조선업, 방직업 등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이것 역시 원자재는 해상무역을 통해 들여온 원료에 의존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통해 원자재를 조달했는데. 네덜란드는 이와 달리 무력에 의존하여 원주민을 통제하는 방식을 썼다.

결과적으로 암스테르담의 상업자본 및 금융자본은 산업혁명을 이끄는 산업자본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굳이 영국과 같이 산업화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의 유물인 네덜란드의 수공업 길드는 대규모 생산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전 세계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방대한 관료체제를 구축했다. 관료체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서인도회사(WIC)의 규모를 확장하는데 공헌했지만, 그 부작용 또한 심각했다. 영국에서 막 산업혁명이 시작할 무렵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1776년>에서 네덜란드야말로 영국보다 잘 사는 나라라고 평가했지만, 네덜란드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그 이유로 “장기간의 전쟁으로 네덜란드 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세금부담은 급증했고, 노동자의 임금은 급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막대한 세금, 고임금과 제조업 노동력 부족은 네덜란드가 산업혁명 대열에 끼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됐다.

산업혁명에 의한 대량생산.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네덜란드의 쇠락 요인을 살펴보는 것은 성장 요인을 지적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네덜란드 쇠락은 다섯 가지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력한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이 있었다. 영국과는 무려 세 차례 전쟁(1652~1674년)을 치렀는데,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구상했던 세계 제국의 꿈은 무너졌다. 프랑스가 1794년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마침내 지배하게 되면서 1800년 1월 1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산되었다. 둘째,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 지배권을 다투면서 향신료가 유럽 대륙으로 안정적으로 흐르게 되면서 네덜란드가 자랑하던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는 더 이상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카리브 해 도서지역의 노예에 의한 대량 플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 시장은 가성비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셋째, 청나라가 중국 통일을 이룬 뒤 해금정책을 강화했고, 일본이 은 생산을 줄이면서 네덜란드가 주름잡던 동양무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넷째,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윌리엄 3세를 네덜란드 총독이자 영국 국왕으로 옹립했는데,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총독보다는 영국 국왕의 임무에 치중했다. 그는 영국을 위해 네덜란드의 이익을 희생하기까지 했다. 다섯째, 네덜란드 은행은 과거 스페인과 푸거 가문이 그랬듯이 정경유착을 통한 번성과 몰락이라는 전철을 밟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근거지로 한 금융업계는 17세기 들어 유럽왕실에 대한 대출을 본격화했는데,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대국들이 양분되어 싸운 7년 전쟁(1756~1763년)이 터지자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지 않은 느슨한 연방제 국가였기에 금융산업 구제책을 펼칠 만한 행정력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다. 43개 암스테르담 은행은 속절없이 파산될 수밖에 없었다. 암스테르담의 금융업 쇠퇴와 함께 네덜란드의 세계 패권은 흔들렸고, 마침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튤립의 꽃말은 ‘헛된 사랑’인데, 그 꽃말처럼 금융업에서는 큰 위기를 상징한다. ‘튤립 버블’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에 대한 과열투기현상을 가리킨다.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작물산업의 호황과 동인도회사의 막대한 이익에 힘입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개인들의 재산 과시욕이 상승했다. 이런 배경을 깔고 역사적인 튤립 광풍이 불어닥쳤다. 1637년에 폭발한 튤립광풍의 전개과정은 황당하다. 1635~1636년 튤립 가격은 59배나 폭등했다. 1637년 튤립광풍의 정점 때에는 튤립구근 하나로 암스테르담 운하 근처에 위치한 호화저택 한 채를 구입할 정도였다. <더 큰 바보이론(The Greater Fool Theory)>에 따르면, 거품경제에서 투기꾼들은 항상 더 비싼 값에 사려는 ‘더 큰 바보’가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에 비싼 값에도 물건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턱없이 높은 튤립가격에 비해 실거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동시에 법원에서도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버블이 순식간에 꺼졌다. 1637년 2월 튤립구근은 갑자기 양파가격 수준으로 폭락했다. 최고가격의 2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가 금융시장에서 표현된 사건이 바로 튤립 광풍이다. 순식간에 버블이 꺼진 것은 꽃을 감상하려는 실수요보다는 가격 상승을 노린 투기 수요가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튤립버블은 정보기술(IT) 거품이나 부동산 거품 등이 부각될 때 거품의 역사적 선례로 자주 오르내리게 됐다.

네덜란드가 힘을 잃어가자 세계 해양패권의 빈 공백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앞서갔지만 최종승자는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자금과 인구가 많은 장점을 활용해 치고 나갔다. 하지만 문제의 ‘미시시피 버블’로 물러서게 된다. 프랑스는 18세기 초 미시시피 강 주변 개발에 나선다. 이른바 <미시시피 계획>이다. 프랑스의 이 계획은 회사의 실적이 매우 나쁨에도 불구하고 발행 가격의 40배까지 주가가 폭등하는 거품 사태를 초래했다. 실체가 뒷받침되지 않는 금융버블의 끝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시시피 버블’은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과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과 더불어 근대 유럽의 3대 버블로 불린다. 미국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착각과 오해, 그리고 비이성적 과열보다 심각한 경제 인식의 오류 상태를 ‘광기’로 표현했다. 그는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1978>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나 1929년 대공황 과정에서 튤립 알뿌리와 미국 주가를 천정부지로 끌어올렸던 투자자들의 근거 없는 집단적 낙관을 광기로 봤다. 그리고 그 광기의 끝에 ‘패닉’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결국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공황의 악순환을 모델화했다.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중 우리나라와 연관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의 외교권이 강제로 박탈당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특사들은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결국 이준 열사는 분사하여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헤이그에는 그를 기념하는 교회와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히딩크 전 축구 국가 대표 팀 감독은 우리에게 친숙한 네덜란드인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온 네덜란드 사람은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조선이름 박연)이다. 그는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왔다가 1627년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태풍에 밀려 제주도 해안에 표착되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려고 해안에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들은 조선 인조 왕 때 귀화하여 훈련도감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출전하였고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박연은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였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유럽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알려진 것은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1630~1692년)의 <하멜표류기> 덕분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1666년 억류생활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멜은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조선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하멜이 네덜란드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동인사 회사로부터 받을 14년간의 임금에 관한 보험료 청구였다. 그만큼 네덜란드가 해운업과 관련 산업인 보험업을 발달시켰다는 증거다. 하멜 표류기는 보험료 청구를 위한 보고서였던 셈이다.

네덜란드에는 대항해시대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해양탐험가와 항해자들이 있었다. 16세기 바닷길을 통해 인도네시아로 가는 해도는 포르투갈만이 아는 국가 기밀이었다. 인도네시아로 가는 길이 필요했던 네덜란드는 자국의 동방 여행가 얀 호이헨 반 린스호텐을 포르투갈 선단에 들여보내 13년 동안 지리정보를 입수하도록 했다. 그는 1593년 <얀 호이헨의 여행기>를 쓸 정도로 베테랑이 됐고, 포르투갈의 일급비밀이었던 동방으로 가는 해도와 항해도를 손에 쥐게 됐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었다. 1594년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포르투갈이 독점하던 동방향신료 무역에 끼어들기 위해 ‘원국회사(遠國會社)’를 설립했고, 첫 번째 항해를 맡은 코르넬리우스 데 호우트만은 1594년 4월 출항하여 1596년 6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반탐에 도착했고, 1597년 2월에는 발리 섬에 도착했다. 비록 이들이 향신료의 생산본산지인 말루쿠 제도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선원 248명 중 94명만 돌아오기는 했지만, 후추 육두구 등 향신료를 가져옴으로써 포르투갈의 향신료 무역 독점권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 다음 해인 1598년 야코프 코르넬리스존 반 네크 탐험 팀은 11월 자바 섬 반탐에 도착했고, 1599년 7월 투자자들에게 무려 4배나 되는 수익을 안겨주는 대성공과 함께 귀국했다.

윌리엄 샤우텐(1567~1625)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항해사였는데, 1616년 남미대륙의 끝이자 ‘절규하는 60도’라 부르는 파도가 험난한 드레이크 해협과 ‘케이프 혼’을 거쳐 태평양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첫 성공 사례다. 야곱 메이르(1585~1616)는 1615년과 1616년에 세계를 일주했다. 아벌 얀손 타스만(1603~1659)은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면서 1639년부터 1641년에 걸쳐 필리핀, 타이완, 일본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탐험하였다. 특히 1642년부터1643년 항해에서는 유럽인 최초로 태즈메이니아 섬과 뉴질랜드, 뉴기니 섬을 발견했다. 그는 1644년부터 1648년까지 통가와 피지, 비스마르크 섬들을 탐험했고, 많은 지리학적 지식을 남겼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 향료 무역과 상업을 위한 항해에 열중하던 네덜란드 당국자들의 무관심으로 그가 발견한 지역들은 방치되었다. 프랑스가 세계 곳곳에 발견한 지역과 섬들을 현재까지 보유함으로써 세계 최대 해양 EEZ(배타적 경제수역) 면적을 보유하게 된 것과 크게 비교된다. EEZ면적에서 네덜란드는 세계 85위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영국(세계 5위), 포르투갈(세계 20위), 스페인(세계 30위) 등에 훨씬 못 미치는 규모다. 왕과 수상, 그리고 위대한 해양 책략가들의 해양 영토 확보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남기는지, 수 세기 후의 우리 세대가 깨닫는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