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는 떠났고 인종차별은 남았다
이주영 기자 jylee@hankooki.com 기사입력 2020-06-15 07:00:42
폭동→약탈→평화 시위로…일각에선 백인 목 누르기 ‘맞불 시위’도
  • 지난 6일(현지시간) 오후 백인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미국 백악관 앞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주간한국 이주영 기자] 지난 6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는 폭동과 약탈을 넘어선 평화 시위로 자리잡았다. 당초 폭력으로 얼룩졌던 시위는 12일째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추고 제도 개혁을 통해 경찰 폭력과 인종 차별을 끝내자는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전 세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차별 논쟁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희생자는 떠났지만 남은 이들에겐 뿌리 깊은 악습에 대한 과제가 남은 셈이다.

생명에 경중 없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는 함성이 전 세계를 울렸다. AP통신과 CNN방송 등에 따르면 지난 6일 워싱턴DC를 비롯한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집결해 평화 시위를 진행했다. 아이와 함께 나선 흑인부부부터 나이가 지긋한 백인들까지 함께 도심 거리를 행진하며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거리에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고, 시민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등 축제 분위기가 형성됐다. AP통신은 “플로이드 사망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열렸고, 시민들은 평화롭게 행진하며 거리 축제의 느낌을 만들어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마을 파티 분위기였다”고 보도했다.

특히 워싱턴DC 시위를 조직한 시민·인권단체들은 길거리 테이블에 간식과 물병을 차려놓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워싱턴DC 경찰은 이날 오전 6시부터 시내 대부분 거리에서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대신, DC 교통당국은 시내로 향하는 지하철 운행을 두배 늘렸고, 버스도 추가로 투입했다.

며칠째 평화 시위가 이어지면서 야간 통행금지령도 풀렸다. 워싱턴DC와 조지아주 애틀랜타, 텍사스주 댈러스는 이날부로 통행 금지를 해제했다. 항의 시위의 진원지였던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와 LA카운티도 통금령을 풀었다.

경찰 폭력을 제어하는 조치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전날 플로이드의 사망을 촉발한 목 조리기 체포 훈련을 금지했고, 네바다주 리노 경찰도 이날 목 조리기 등 경찰의 물리력 사용을 제한하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했다. 한국에서는 전 세계 시위가 있던 지난 6일 100여 명의 참가자가 추모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고 피켓을 든 채 서울 명동에서 청계천 한빛광장까지 침묵 행진을 했다.

반면 미 뉴저지주의 일부 백인들은 ‘목 누르기’ 흉내를 내는 맞불 시위를 벌여 논란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들의 반대 시위는 지난 8일 뉴저지주 글로스터 카운티의 프랭클린 타운십에서 벌어졌다. 청바지를 입은 한 백인 남성이 바닥에 엎드린 채 누워있는 사람의 목을 무릎으로 누르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백인 시위에는 여러 명의 백인들이 참가했고, 성조기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현수막도 등장했다. 플로이드 사망을 추모하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메시지인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를 비꼰 ‘모든 목숨이 소중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도 나타났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조롱하는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의 백인 목 누르기 흉내는 플로이드의 사망을 조롱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바람처럼 사라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미국의 인종차별 시위는 영화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흑백 인종 차별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퇴출됐다.

미국 시넷에 따르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방영 가능 작품 목록에서 일시 제외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인종차별주의 묘사’ 때문이다.

미국 작가 마거릿 미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꼽히며, 1939년 개봉된 후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수상해 최고 영화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노예제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백인 주인에게 시종드는 흑인 하녀의 모습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HBO맥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 제작 당시 미국 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민족적, 인종적 차별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며 “인종차별주의적 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못된 것”이라며 “그런 묘사에 대한 설명 없이 영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뿌리깊은 美 인종차별 성찰 촉발

이번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항의 시위는 그동안 미국 사회 내 뿌리 깊게 박혀있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성찰을 촉발한 것이란 분석이다. CNN 뉴스는 “플로이드의 죽음이 미국 사회에서의 경찰의 역할과 사법체계 안에 존재하는 제도적인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성찰을 촉발했다”며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풀뿌리 민중뿐만 아니라 워싱턴 제도권에 있는 정치가들도 당파를 초월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미국 민주당은 지난 8일 근본적인 경찰 개혁법안을 발표했고, 공화당 역시 다음날인 지난 9일 경찰 개혁법안 마련 계획을 발표했다. 플로이드가 살았던 텍사스주의 애보트 주지사는 경찰 개혁을 정치가의 손에만 맡기지 않고 희생자 가족들의 주도로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경찰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관련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의미다.

이같은 분위기는 여론 조사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최근 CNN/SSR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7%가 사법제도가 인종차별적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5년 조사에서 같은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49%만이 사법제도가 차별적이라는 대답이 나온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주영 기자 jylee@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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