稅收 확대 위한 英國의 茶조령… 1773년 보스턴 티 사건 통해 미국 독립전쟁으로 비화

나대니얼 댄스가 그린 프레데릭 노스 수상 초상화. 위키백과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 대륙간 무역의 대상이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 등 4대 향료였다면, 17~18세기의 주 대상은 커피와 홍차였다. 영국은 네덜란드가 선점한 커피시장 대신 홍차시장을 차지했다. 세계 무역 시장을 주름잡던 네덜란드와 떠오르는 태양 영국간의 쟁패는 불가피해졌다. 네덜란드는 1623년 뉴욕 맨해튼을 영국에 넘기는 등 위축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들어 유럽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7년 전쟁(1756∼1763년)’을 벌였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싸움인데, 대영제국 건설의 전환점이 된다.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과 연합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승리를 거둔다. 7년 전쟁과 같은 시기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도 영국은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전쟁 승리의 대가는 혹독했다. 영국은 세수 총액의 절반인 1억 30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적자를 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1만 명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주둔군의 비용도 부담해야 했다(출처,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경제공부》,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황선종 옮김, 어크로스, 2017). 1773년 영국 프레데릭 노스 수상(수상재임 1770~1782년, 재무장관 겸임 1767~1782년)은 재정확충과 세계경영 자금 확보를 목표로 《차 조령 (茶條令)》를 시행에 옮기게 된다. 이 조령이 결과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독립시키는 결정적 기폭제가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프레데릭 노스 경은 명문가 출신으로 명문 이튼 칼리지를 나와 옥스포드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얻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도 공부하면서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재무장관과 내무장관은 물론 내각 수반을 맡게 된 38세의 연부역강한 노스 수상이 등장할 즈음 영국은 스페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비롯된 적자재정과 북미 주둔비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7년 전쟁 후 국가채무를 해소하기 조지 3세(재위 1760~1820년) 시기 네 명의 수상들은 미국의 13개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조세전략을 추진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사람이 프레데릭 노스 수상이었다. 1차 과세 시도는 1765년 영국이 식민지 미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지조례 (Stamp Act)’다. 이 과세제도는 미국 식민지인들의 반발 속에 1년 만에 철회됐지만, 미국 독립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2차 과세시도는 노스 수상의 ‘차 조령(Tea Act)’이었다. 1773년 4월 입법된다. 미국 등 영국의 식민지에서 홍차를 팔 권한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게만 있다는 것이 골자다. 중상주의를 내건 크롬웰의 항해조례를 홍차에 적용한 셈이다. 당시 식민지 미국인들은 네덜란드 이민자들을 통해 처음 홍차를 접했는데, 네덜란드가 영국에 지면서 영국이 홍차를 공급하게 됐다. 하지만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공급하는 홍차는 그 가격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식민지 일반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때문에 식민지 미국 시민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비싼 홍차 대신 네덜란드 등을 통해 값싼 홍차를 밀수하여 마실 수밖에 없었다. 즉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입은 줄어들었고, 영국 재정에 도움되지 못하게 된다. 차조령 제정의 이면에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지나치게 많이 사들인 오래된 홍차를 무관세로 팔아 치우려던 전략이 내포돼 있었다. 1773년 당시 영국에는 약 1700 여만 파운드의 차가 남아돌아가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특권을 주는 것뿐이었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남아돌아가는 차를 아메리카 대륙에 팔 수 있도록 동인도회사에 특권을 주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아는 대로 미국의 독립이었다 (출처, 《금융으로 본 세계사》, 천위루·양천 지음/하진이 옮김, 시그마북스, 2017).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다’라는 말은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살아있는 한 세금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중세 이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소득의 절반을 영주들이 떼어가는 가혹한 세금포탈의 결과였다. 국가가 세금을 걷을 때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한다. 명예혁명 직후 집권한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창문세’를 만들었다. 창문세는 잘 사는 집일수록 유리 창문이 많다는 점에 착안한 일종의 재산세로 155년간 존속됐다. 국가가 한 번 만든 세금은 반발이 거세도 웬만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주는 사례다.

프랑스의 창문세는 프랑스혁명을 촉발시켰다. 과중한 세금은 국민의 불만을 누적시키고, 임계점에 이르면 반란이나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과세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정권의 몰락과 연계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당시 홍차는 ‘중국→네덜란드→밀수를 통한 미국 반입→영국 및 기타 영국 식민지’ 순으로 유통되면서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반면 영국 정부가 제시한 1773년 ≪차 조령≫은 ‘중국→동인도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바꿔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은 거품이 빠진 가격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영국 차 조령을 통해 동인도회사가 직접 미국 식민지에 홍차를 공급하게 되었고, 그 덕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 홍차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미국의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정작 불만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식민지의 홍차 밀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회피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북미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 총독이 파견됐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세수 확대 조치들이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지면서 식민지 자치와 부딪히게 됐다.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한 18세기 보스턴은 독립혁명을 이끈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한 역사적 현장이자 미국의 건국정신이 싹튼 곳이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대로 미국 최초의 영국 이주민은 메이플라워호보다 13년 먼저 1607년 버지니아에 도착해 ‘제임스 타운’을 건설한 사람들이었다. 버지니아 이민자들이 신대륙 경영의 기반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인들이 그들의 선조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들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건너온 102여명의 청교도들인 '순례의 조상들'이다. 그들의 ‘메이플라워 언약’이 미국 건국의 정신으로 존중됐고,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30년, 부유한 청교도 1000명은 영국 국왕의 칙허를 얻어서 아라벨라 호를 포함한 11척의 배를 타고 매사추세츠 만에 도착했다. 이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영국 보스턴의 지명을 따라 새로운 삶의 터전을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공화국 건설을 구상한 지도자는 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이 된 존 윈스럽이었다. 아라벨라 호에서 윈스럽은 기독교적인 모범이 될 만한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언약과 혁명의 도시, 미국 보스턴’, 안지현). ‘언덕 위의 도시’란 산상수훈과 팔복에 관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교도들이 세운 ‘신 예루살렘’으로서의 보스턴은 미국의 정신적 메카이기도 하다.

청교도들은 미국에 정착하자마자 학교와 대학을 설립했다. 1635년 설립된 보스턴 라틴 학교와 1636년 설립된 하버드대학은 그 첫 열매였다. 보스턴은 ‘교육의 도시’로 불릴 정도다. MIT, 보스턴 대학, 보스턴 칼리지, 웰즐리 대학 등 수많은 명문 대학들이 세워졌다. 보스턴 차사건은 이런 정신적 토양 위에서 발발했다. 저렴한 차 구입 루트를 빼앗긴 미국의 차 상인들과 영국의 식민 지배에 반기를 들 준비를 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은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홍차 사건'을 일으켰다. 주동자인 새뮤얼 애덤스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6촌 형) 가 이끄는 150여 명의 ‘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은 5000 여 명의 주민과 상인들의 지지 속에서 보스턴 항에 들어온 동인도회사의 배 세 척에 올라가 342상자(9000 파운드, 16억원 상당)의 차를 바다에 던졌다. 보스턴 항구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찻주전자'가 되어버렸다. 1773~1774년의 겨울 동안 보스턴 차 사건을 본뜬 차 사건들이 필라델피아, 뉴욕, 볼티모어, 사우스 캐롤라이나 등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이로 인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사실 보스턴 홍차사건 이후 독립선언 반년 전인 1775년 말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지향할지, 영국의 양보를 얻는 선에서 마무리할지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여론이 갈렸다. 미국 지도자들이 원했던 건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조지 워싱턴 등 ‘건국의 아버지들’의 주장은 아예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보다 나은 대우, 나아가 자신들만의 의회를 꾸려서 조세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영국은 '연합왕국'으로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등의 구성원들이 의회도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다. 때문에 미국의 입장은 자기네들을 식민지인으로 차별하지 말고,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왕국'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기네들을 연합왕국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대우해달라는 정도에 가까웠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워주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11억 원 가량의 성금을 모아 영국 노스 수상에게 가져갔으나 거절당했다 (출처, ≪나무위키≫, 보스턴 차사건). 미국의 행태에 분기탱천한 노스 수상 내각이 택한 것은 강경책이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인들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뭉치게 됐다.

영국은 바다에 버려진 홍차 값을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사건 주모자들을 영국으로 압송하여 재판하겠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영국 정부는 보스턴과 매사추세츠를 응징함으로써 다른 식민지들을 위협하고자 했다. 영국의 노스 수상은 이듬해인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특히 ‘자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국가채무를 줄이려는 영국 노스 수상의 차조령 제정과 미국의 반발, 그리고 식민지 미국을 손보려는 그 후 일련의 강경 조치 때문에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은 필연적인 수순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독립하자는 움직임에 불을 댕긴 또 하나의 동인은 1776년 1월 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론 (Common Sense)》이다. 책은 48쪽에 불과했지만, 미국이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함을 촉구하고,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보임으로써 식민지 미국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3개월 만에 10만부, 1년 만에 15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는 “페인의 펜이 없었더라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쓸모 없었을 것”으로 극찬했다. 이 책은 명실공히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미국은 보스턴 홍차 사건을 계기로 1776년 독립선언문을 채택했고, 이후 8년 간 대영제국과 전쟁 끝에 파리조약에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독립은 프랑스혁명(1789∼1794년)으로 이어졌고, 나폴레옹 황제의 등장을 가져왔다.

‘찻잔 속의 태풍(A Storm In The Teacup)’은 찻잔 속의 커피를 저으면 찻잔 속의 작은 공간에서 보기에는 태풍처럼 큰 일로 보이지만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파급은 거의 없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노스 수상의 차 조령은 ‘찻잔의 재앙’이 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을 야기한 영국 수상 프레데릭 노스와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는 역사상 최악의 결정 중의 하나를 내린 인물로 평가된다. 노스 수상은 1770년부터 1782년까지 수상을 역임했지만, 재임 기간 후반에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대응 실패로 쫓겨났다. 노스 수상은 차 조령을 통해 1775년 영국의 국가채무를 1000만 파운드 절감했지만 절감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의 여파로 영국의 국가채무는 75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노스 총리의 차 조령은 당초 의도대로 국가채무를 줄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른자위 식민지인 미국만 잃은 실패한 책략이었다. 차 조령의 강제집행의 우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보스턴 차사건 이후 미국독립운동 초기 과정에서 조지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제시한 유화책을 거절함으로써 미국독립전쟁을 야기한 것은 뼈저린 실패다. 여기서 이겼다면 모를까 건곤일척의 승부처에서 패배한 것은 영국으로서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국가책략의 집행과정에서 당초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지만, 실수 직후의 다음 정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의 과제는 전체 승부를 가른다. 역사학자 벤저민 라바리는 이 사건에 대해 “고집스러운 노스 수상이 대영 제국의 관에 못을 박았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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