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말과 큰 곤봉’ 전략으로 하와이·필리핀 ·파나마운하 접수…태평양을 ‘미국의 바다’로

TR의 ‘곤봉외교’를 <걸리버여행기>에 빗댄 1904년의 풍자화. 그림=위키피디아

19세기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신은 어리석은 자들과 주정뱅이 그리고 미국인들을 특별히 돌보신다”고 빈정댔다. 미국의 태생적인 지정학적 우위를 부러워했다.

미국의 지정학적 장점에 대해서는 다수의 학자들이 평가하고 있다. “운송의 균형은 부와 안보를 결정한다. 원양 항해 기술은 도달 범위를 결정한다. 산업화는 경제적 근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외부세력에의 노출 정도에서부터 지구력, 경제적 주기, 미래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미국은 이 세 가지 요인으로 미루어 볼 때, 세계 최고의 지리적 여건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억세게 운이 좋은 나라고, 1890년부터 미국은 마침내 이 지리적 여건을 지렛대 삼아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 지정학 전문가 피터 자이한의 분석이다(『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저/ 홍지수, 정훈 역, 김앤김북스, 2018).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증기선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교통과 통신혁명’ 덕에 강대국의 활동 무대는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였다. 특히 해군 전함의 출현으로 미국 외교는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종전까지 미국의 천연방어 장막 역할을 하던 바다는 1812년 영국으로부터 대서양을 통한 침공을 당한 이후 더 이상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오히려 대서양은 유럽의 전력을 미국 대륙으로 운송하는 고속 침투루트로 변화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 중이었다. 일본은 해군력의 강화로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청나라를 무너뜨려, 태평양마저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왼쪽의 대서양과 오른쪽의 태평양은 미국안보의 아킬레스건이자, 전략적 상수였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것이 시오도어 루즈벨드(TR) 대통령과 알프레드 마한의 ‘해양력(Sea Power)’ 책략이었다.

수비 전략의 ‘몬로 독트린’을 바꾼 공격 전략의 ‘TR추론’

19세기 말 당시 미 해군은 세계 해군 랭킹을 언급하기조차 무색했고, 사양길에 접어든 스페인 해군 정도나 비교 대상이 될 약체였다. 더욱이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를 다른 외국에게 매도할 가능성까지 높았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에게 큰 문제였다. 스페인이라면 상대할 만했지만, 새로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식민지를 양도받을 나라는 상대하기 버거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TR이 먼저 취한 것은 해군력 강화보다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수비 위주의 ‘먼로 독트린’을 공격 위주의 ‘TR추론’으로 바꿨다.

미국의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재임 1817~1825년)에 의해 1823년 선언된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비식민지화의 원칙’, ‘불간섭의 원칙’, ‘고립주의 원칙’ 등 세 가지 원칙이다. 하지만 TR시대에 이르면서 ‘먼로 독트린’은 60년 이상 경과됐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유럽 제국주의 열강끼리 외교거래를 하던 시대상황에서는 구시대의 전략이었다. 이에 TR은 1896년 ‘먼로 독트린에 대한 루스벨트 추론’을 발표했다.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유럽 문제에 이끌려 전쟁에 말려 들어가는 사태를 방어하기 위한 고립주의 정책을 표명했지만,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다’로 요약되는 1896년 TR추론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시도하려는 유럽 국가의 행동을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공세전략이었다.

TR추론은 고립주의의 먼로 독트린을 제국주의 이론으로 변화한 것이며,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해군전함을 통해 적이 언제든 미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은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적을 찾아서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어디로도 진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여러 남미 국가들이 유럽 국가들에게 진 부채 때문에 그들의 개입을 초래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국이 대신 빚을 갚아 주는 정책을 취했다.

TR은 이런 정책을 수행할 때 “부드러운 말과 큰 곤봉”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그의 외교는’곤봉 외교(Big Stick Diplomacy)’로 불렸다. 그는 1906년에는 그 동안 공들여 증강한 해군력을 과시하고자 ‘그레이트 화이트 함대’에게 세계를 일주하게 하는 퍼포먼스도 연출했다.

한편 TR추론에 담긴 TR의 태평양 전략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

사실 미국은 먼로 독트린 이후부터 한편으로는 유럽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주창하면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하와이 진출, 필리핀 진출, 일본 에도 막부에 개항을 요구한 흑선(黑船·구로후네) 사건(1853년)이나 조선의 개항을 요구한 제네럴 셔먼호 사건(1866년) 등 태평양 쪽에 관심을 더 두고 있었다. 태평양에 대한 실효적 성과는 TR이 이루게 된다.

하와이왕국 합병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년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하와이 왕국이었다. 미국의 하와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 시 미국이 구사했던 책략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 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방식이다.

하와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미국과 극동을 잇는 중간기지 역할을 해왔고, 1887년에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진주만을 미국 해군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와이로 이민 온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들이었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의 이민이 급증하였다.

그러다 하와이 합병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 관세법이 1890년에 개정되었고, 이 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혜택을 폐지하는 하와이 왕국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하와이 혁명이 일어나고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합병운동 ’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미국 의회는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하였다. 미국 합병 직후에는 ‘준주(準州)’였으나,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태평양 한 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의 해양 전략적 가치는 어마어마하며, 20세기를 미국의 세기, 태평양시대로 만드는 데 중심부 역할을 하게 된다. 알래스카 EEZ면적은 377만㎢이며, 하와이 EEZ면적은 247만4000㎢ 로 미국 전체 EEZ 면적인 1135만1000㎢ 의 21.8%이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강탈

태평양은 오랫동안 ‘스페인의 호수’로 불렸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정복하고 필리핀의 마닐라 항과 멕시코의 아카풀코 항에 정기 무역선을 운항했다. 16세기 중반에서 1815년 사이에 이 항로를 통해 멕시코와 페루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됐고, 거래대가로 중국의 도자기와 홍차, 비단이 무역선을 통해 아메리카 전역에 퍼졌다. 주거래 상품이 중국제품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호수’는 ‘중국의 호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대 스페인 전쟁이 있었던 1898년을 기점으로 태평양은 ‘미국의 호수’가 됐다. 이미 하와이를 비롯해 많은 태평양 도서들을 확보한 미국은 스페인의 아시아 거점인 필리핀마저 접수함으로써 태평양의 해양대국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TR은 스페인과의 두 개의 전쟁 중 쿠바에는 직접 참전했고, 또 다른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에서는 해군 차관으로 막후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쿠바전쟁에 이어 쿠바에 인접한 푸에르토리코와 태평양의 괌을 정복하고 다시 필리핀을 공격하였다. 스페인과의 갈등이 고조되는데도 백악관은 전통적 고립주의냐, 신흥 제국주의냐를 놓고 확실한 전략이 없었다. 그러나 해군 차관 TR은 선전 포고 2개월 전에 동양함대 사령관인 조지 듀이에게 스페인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체 없이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도록 극비훈령을 내렸다. 조지 듀이 제독은 마한의 해사 1년 선배이지만, 미국 해군 최초로 해군대장이 된 인물이다. TR과 마한, 듀이는 해군정책을 주도한 삼총사이며, 이들 삼총사의 비전과 의지에 의한 공세전략으로 미국은 제국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결국 스페인의 제의로 1898년 12월에 파리 조약이 체결되고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미국은 배상으로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양도받았으며, 스페인은 미국에 필리핀의 영유권을 약 2000만 달러에 양도했다.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필리핀 제도는 미국의 자유로운 깃발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국민들은 일제히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미국과의 사이에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필리핀 전쟁에는 12만 명의 미군이 투입되었고, 4500명의 미군 전사자와 20만 명의 일반 필리핀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혁명군을 계속 제압하여, 1901년 7월에 미군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관을 실현했다. 1902년 7월에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필리핀 조직법’을 법적 근거로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의 주도 하에 필리핀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TR이 한국인에게 비난받는 큰 이유는 필리핀 문제와 엮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점이다. 미국은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침략과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고,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 친 것이다.

이승만이 천신만고 끝에 TR 대통령을 면담했지만 TR이 약소국가 청년의 하소연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이승만이 TR을 만나기 닷새 전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뒤였다.

파나마 운하 건설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첩경을 얻기 위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성동격서(聲東擊西)’전략처럼 미국은 동쪽의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면서 서쪽의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운하가 해양 교역에 획기적으로 유용하리라는 생각은 19세기 말부터 유럽대국들이 꿈꾸어왔던 것이다.

미국은 당시 카리브 해와 태평양 양쪽을 모두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운하를 건설한다면 미국이 누릴 수 있는 군사적 가치는 엄청났다. 필요한 경우 전함을 신속하게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혹은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902년에 TR정부는 프랑스 회사로부터 건설권을 사들였으나 콜롬비아 의회가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여 미국의 계획은 암초에 부딪쳤다. 미국은 텍사스합병, 하와이 왕국합병 시 사용했던 단계별 점령 매뉴얼인 ‘①미국 국민 목표지역 이주→②미국 국민 선동으로 반란군 저항→③미국 군대 파견 및 점령’을 파나마 공화국 수립에도 유사하게 적용했다.

결국 파나마 지역에서 미국의 선동으로 1903년에 콜롬비아 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도와 파나마공화국을 수립하였고, 콜롬비아에게 파나마를 잃은 대가로 25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주었다.

미국에 의해 독립된 파나마공화국의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어 각국 선박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개방되었다. 그해 11월에 체결된 조약에서 파나마는,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놓인 폭 16킬로미터의 땅을 미국에 빌려주며 그 대가로 1000만 달러를 일시불로 받고 해마다 25만 달러의 사용료를 받기로 약속했다.

이후 미국은 85년 동안 파나마 운하의 운항권을 독점적으로 관리해 왔고, 1999년 12월 31일에 이르러서야 운항권이 파나마로 이양되었다. 미국의 물류 동선이 남미대륙 남단을 우회했던 것을 첩경인 파나마 운하 건설로 물류비와 국방비를 대폭 경감한 해양전략의 중요한 사례다.



홍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