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한초점] '데뷔 50년' 윤여정, 오스카 퀸으로…세계가 '윤며들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eun@sportshankook.co.kr 기사입력 2021-04-29 07:03:28
  •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배우 윤여정(74)이 마침내 전 세계를 홀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한국 배우는 그가 최초다. 102년 한국 영화의 역사가 새롭게 쓰인 순간이다.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스테이션과 돌비 극장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에서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의 순자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그는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에 역대 두 번째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아시아 여배우가 됐다. 또 여우조연상 부문에서 77세에 수상한 ‘인도로 가는 길’(1984)의 페기 애슈크로프트, 74세에 수상한 ‘하비’(1950)의 조지핀 헐에 이어 세 번째(만 나이 기준 73세)로 나이가 많은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날 우아한 감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뒤 무대에 올라 시상자이자 ‘미나리’의 제작자인 배우 브래드 피트를 향해 “드디어 만나 영광이다. 우리가 영화 찍을 때 어디에 계셨느냐”는 농담으로 시작부터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어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다. 많은 분이 내 이름을 ‘여여’나 ‘정’이라고 하더라. 오늘은 용서해드리겠다”며 “아시아권에 살면서 서양 방송을 많이 봤는데 직접 이 자리에 오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내게 투표해준 아카데미 관계자분들과 ‘미나리’ 가족들에게도 감사하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아니라면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감사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경쟁이란 건 있을 수 없다. (후보에 오른) 배우들 모두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해냈다. 우리 모두 승자다.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경쟁하겠나. 그의 훌륭한 연기를 많이 봐왔다. 내가 운이 좋아 수상했을 뿐”이라며 “일하러 나가라고 잔소리한 아들들 덕분에 상을 받은 것 같다. 김기영 감독님께도 감사하다. 첫 영화를 함께한 첫 감독님이었다. 살아계셨다면 굉장히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전했다.
  • 사진=연합뉴스
시상식 이후 LA 총영사관에서 진행된 한국 특파원단과의 기자회견에서는 화이트 와인 한 잔과 함께 한층 솔직한 속내를 풀어놨다. 윤여정은 “상을 타서 보답하게 돼 정말 감사하다. 너무 많이 응원해주시니까 눈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힘들었다. 축구선수의 심정을 알겠더라. ‘2002년 월드컵 때 국가대표 선수들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김연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처음 받는 스트레스였다”고 그간 느낀 부담감을 털어놨다.

이어 “시상자인 브래드 피트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느냐”는 질문에 “브래드 피트가 우리 영화 제작자”라며 “‘다음 영화에는 돈을 좀 더 쓰라’고 했더니 많이는 아니고 ‘좀 더 쓰겠다’고 했다. 잘 빠져 나가더라”고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폭소케 했다.

또 “아카데미 상을 받은 게 최고의 순간인가”라는 물음에는 “1등, 최고 이런 말이 싫다.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다. 다같이 ‘최중’되면 안 될까”라며 “앞으로의 계획은 없다. 상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건 아니잖나.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현지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는 입담은 계속됐다. 윤여정은 28일 미국 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프로젝트 제안이 오면 한국 사람들은 내가 할리우드를 동경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계속 미국에 오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하면 (미국에 사는) 아들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무례한 질문엔 위트로 응수하기도 했다. 그는 시상식 이후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외신 기자가 브래드 피트의 냄새에 대해 묻자, “나는 개가 아니다. 냄새 맡지 않았다”며 유머러스하면서도 뼈있는 답변을 내놔 화제를 모았다.

윤여정의 재치 있는 화법은 해외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그의 수상 소감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의 장면으로 꼽혔다. CNN은 “윤여정이 쇼를 훔친다”(쇼 스틸러)고 표현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윤여정의 수상 소감을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언급하며 “딱딱했던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고 호평했다. 뉴욕타임스 카일 뷰캐넌 기자는 트위터에 “내년 오스카 진행은 윤여정에게 (맡기자)”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윤여정에 스며들다’는 뜻의 ‘윤며들다’는 신조어가 탄생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센스 넘치는 입담 뿐 아니라 그의 패션, 애티튜드가 세대를 아우르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시상식 무대 뒤, 드레스 위에 항공점퍼를 걸친 스타일링은 물론 청바지와 에코백 등 평소에 즐겨 착용하는 아이템들까지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70대에 다시 한번 눈부신 순간을 맞은 윤여정의 행보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때가 있고, 꿈을 꾸고 사는 데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상기시킨다.

윤여정의 차기작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 플러스가 제작하는 드라마 ‘파친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광복 후 1980년대까지 일본으로 건너가 모진 삶을 산 조선인 4세대의 삶과 정체성을 그린 작품으로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이 쓴 동명의 장편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미나리’에 이어 ‘파친코’까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의 활약에 기대가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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