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영진 "세상 밑바닥 맛본 인물 연기하니 또 다른 도전하고 싶어요"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msj@sportshankook.co.kr 기사입력 2021-06-20 11:16:08
MBC 드라마 '목표가 생겼다'서 유미 역 열연
  • 배우 이영진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인터뷰 스틸 촬영을 위해 초 단위로 표정과 포즈를 바꿔 내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모델의 끼는 죽지 않았구나 싶다. MBC 수목극 '목표가 생겼다'에서 잇따르는 불행을 겪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엄마 유미 역을 열연한 이영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1998년 모델로 데뷔해 배우로서는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이야기'(민규동, 김태용 감독/1999)로 화려하게 대중에게 첫 선을 보였고 공포영화들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인 후 어느새 배우 경력 20년차를 넘어섰다. '아프리카'(2002), '요가학원'(2009), '열여덟, 열아홉'(2012), '환상속의 그대'(2013), '배심원들'(2019) 등에서는 매력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을 멋지게 소화해냈다면, 지난 2018년 MBC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에서 20살 딸을 둔 푼수끼 넘치는 모델 출신 엄마 역을 열연하며 배우로서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목표가 생겼다'의 유미는 생각처럼 간단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당시 유미 역은 모성애가 넘치는 엄마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이영진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모두 쉽게 기대하고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 엄마의 모습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기에는 대중들께 그런 이미지를 보여드린 적이 없어서 부담이 됐어요. 제 나이로는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나이이죠. 시청자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나 고민하던 중 대본이 많이 수정됐고 지금의 유미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탄생하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딸을 보육원에 버리는가 하면 술에 빠져 살면서 딸의 가출을 겪게 되는 유미가 탄생했죠. 심소연 감독님이나 류솔아 작가님께 저를 캐스팅하신 특별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촬영 전 드레스 리허설 때 유미에 어울리는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을 입고 리딩을 하러 가서 작가님을 ㅂㅚㅆ을 때 '제가 생각한 유미와 딱이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운이 나더라고요."

  • 배우 이영진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유미는 마치 현실 세계 속에서 일어날 법한 나쁜 일을 모두 모아 겪은 인물인양 구구절절 힘든 사건들을 지난 인물이다. 남편의 죽음이후 집에 불이 나고 그는 딸에게 저질러서는 절대 안 될 행동을 해 수감 생활까지 하게 된다. 퇴소 후에도 집에서 하우스 도박을 벌이는가 하면 술에 빠져 하나 뿐인 딸을 거의 돌보지 못하는 캐릭터다. 다양한 작품 속 인물들을 겪은 이영진에게조차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도전을 했고 성취감을 얻었다기 보다는 가까이 다가갔다는 느낌이 커요. 제가 유미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어요. 제가 술을 입에도 못대는 사람인데 알코올 중독 연기가 어려웠다기 보다는 삶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푸석푸석하고 생기 잃은 사람의 모습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유미는 오랜 시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피폐함이 있을텐데 그런 모습에 도달하고 싶었죠. 잘 표현됐는지는 시청자 분들이 판단해주실 몫 같아요. 주위 지인들은 '잘했어'라고들 이야기 해줘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고괴담2'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데뷔한 이후 한동안 공포 영화의 여주인공 캐릭터 제안이 이어지며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던 시간들도 있었다.

"한동안 '여고괴담2'에서의 시은이 같은 역할만 계속 제안을 받았죠. 공포 영화 속 캐릭터이더라도 장인 정신으로 확장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어요. 하지만 제2의 시은이, 제3의 시은이를 양산하는 것 같아서 답답했던 시절이 있죠. 연달아 공포물을 하면서 저 스스로 한계도 느꼈고요. 그런데 처음 배우 생활 10년차 정도까지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면 이제 20년차잖아요. 이후 정말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해봤고 지금은 공포물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런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그 장르에서 이런 식으로 해봐야겠다는 아이디어도 생겼고요. 한동안 중성적 캐릭터로서 소비됐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양한 배우들이 중성적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하고 있고 또 포맷도 다양하게 열려 있어서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아동 학대와 방임이 연달아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드라마 '목표가 생겼다'는 유의미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류솔아 작가가 애초 기획의도를 통해 제시한 '행복'이라는 주제를 뛰어넘는 다양한 공감거리들을 남겼다.

"우리 드라마가 소현(김환희) 중심의 내용이잖아요. 유미가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인물이어서 연민의 시선을 받겠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극 중에서 수감 생활도 하고 처벌도 받으며 일종의 권선징악도 이뤄지고 특히 소현이 유미를 향해 '그런 상황이 와도 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결말도 좋았어요. 가족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던진 것도 좋았죠. 혈육만이 가족은 아니잖아요. 자격 없는 부모들도 실존하는 게 사실이고요. 김도훈이 연기한 윤호가 '손을 내밀면 더 나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걸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런 긍정적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성취감과 만족감이 느껴진 작업이었습니다."

20여년의 배우 생활을 해오는 동안 탄탄대로 지름길도 있었고 가시밭길까지는 아니어도 돌뿌리가 깊은 자갈길도 걸었다. 그와 함께 출발했던 동료 배우들이 저만치 앞서 걷던 시간도 있었는가 하면, 그 홀로 자신의 영역에서 독야청청 빛난 시간도 있다. 여배우에게는 가장 위험하다는 30대 초반을 지나 어느새 20년차가 넘는 배우가 되고 보니 남들과의 비교나 경쟁은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진작 깨달았다.

"모델로 한창 활동할 당시는 제가 가진 것보다 더 인정 받고 높은 위치에 섰던 것 같아요. 제 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운도 좋았고 주위 도움도 컸죠. 배우로 활동하면서는 저보다 한참 앞서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어느새 활동을 그만두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사람마다 자기 스타일의 라이프가 있는 거죠. 어릴 때 이 쪽 일을 시작했잖아요. 누구와 비교하면서 행복하거나 우울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30대가 막 됐을 때 한 번 위기가 찾아왔죠. 그 때는 30세가 넘은 여배우에 대해 마치 한물 간 사람 취급하는 경향도 있었어요. 그 때 주로 받았던 질문이 '결혼 안하느냐, 시집 안가냐'는 소리였어요. 그 때 나는 실패한 인생인가 의문도 들었고요. 그 때 제게 돌파구가 되어 주고 영화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해 준 작품이 이희준, 한예리 배우와 함께 했던 '환상속의 그대' 였어요."

강진아 감독이 연출한 '환상속의 그대'는 이영진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됐다. 그동안의 활동 기간 중에 가장 은인으로 꼽을만한 사람을 얘기해달라는 질문에도 어김 없이 강진아 감독이 소환됐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작 3선에도 '환상속의 그대'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저라는 사람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작품이죠. 흥행이 막 잘 되고 그랬던건 아니지만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어요.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 있잖아요. 삶 자체가 그런 거고요. '목표가 생겼다'의 유미 또한 그런 면이 있었는데 '환상속의 그대'의 기옥 또한 제가 저 스스로를 알아가게 되는 역할이었어요.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 준 작품이죠. 그래서 배우 생활을 하면서 제가 가장 고맙다고 생각하는 은인 같은 분은 강진아 감독님 그리고 '배심원들' 제작을 하신 김무령 대표님이에요. '환상속의 그대'는 제게 배우로서의 성취감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한 작품이니까요. 그리고 김무령 대표님과는 영화가 끝나고도 근거리에서 마음을 나누는 존재인데 제게 너무 고마운 분이죠. 그리고 지금 제 일을 함께 봐주고 있는 이상훈 매니저와의 인연도 너무 귀하고 소중합니다."

또 다른 대표작을 두 편 더 골라달라는 질문에는 역시 데뷔작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우도환, 조이와 함께 한 MBC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를 꼽았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세상에 배우 이영진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잖아요. 너무 좋은 기회였고 큰 운이었죠. 그 때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품이 저를 세상에 소개해준 굉장히 고마운 작품이라는 걸 느끼죠. '위대한 유혹자'는 '목표가 생겼다'와 동일 선상에 있는 것 같아요. 제게 색다른 도전이었고 푼수끼 넘치는 엄마 역할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드렸어요. '목표가 생겼다'는 또 세상 밑바닥에 떨어진 엄마 역할에 대한 도전이었고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도전들이 성취감까지 얻게 해서 참 감사해요."

여전히 다양한 도전을 꿈꾸고 있지만 제사카 차스테인이 출연했던 '미스 슬로운'이나 틸다 스윈튼의 '케빈에 대하여' 같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국내에서 제작되면 꼭 참여하고 싶은 의지도 있단다.

"해외 영화 중 인상 깊게 봤고 또 저 스스로도 저런 역할이라면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작품과 역할은 제시카 차스테인의 '미스 슬로운'의 엘리자베스 슬로운이나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이에요. 또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아이엠 러브'의 엠마와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도 떠오르네요. 여성이 주인공이면서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 작품이라는 점이 공통점이에요.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다루면서도 캐릭터가 단순히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은 점도 좋았어요 허황된 여성의 삶 속의 굴곡을 깊이 보여준다던가 고난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엄마의 모습 등 차채로운 캐릭터들이 너무 매력있죠. 제가 더 나이들고 깊어졌을 때 이런 캐릭터들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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