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였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은 사회풍자의 성격이 있었기에 더 각광 받았다. 특히 체육계에 이 유행어는 더욱 와 닿았다. ‘1위’, ‘금메달’, ‘최고’가 아니면 기억해주지 않았다. 올림픽은 더 심했다.‘금메달 만능주의’로 전 국민이 무조건 금메달을 외쳤고 은메달을 딴 선수는 세계 2위임에도 눈물을 흘리고 “더 잘하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하지만 2020 도쿄 올림픽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가졌던 ‘1등주의’가 무너지는 것이 확인된 기념비적인 대회가 됐다. 1984년 LA올림픽 이후 37년 만에 최소 메달(20개)에 그쳤음에도 국민들은 금메달이 아닌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올림픽 영웅’으로 기억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유도 조구함(29·KH그룹 필룩스)과 안바울(27·남양주시청)이다. 조구함은 결승에서 패한 후 상대 선수의 손을 치켜세우며 승자에 축하를 보내는 모습으로 크게 화제가 됐다. 안바울은 동메달을 획득한 후 펑펑 울며 “아쉬워서가 아니라 도와주신 분들의 고마움이 생각나서”라고 말해 올림픽이 가지는 간절함을 새삼 느끼게 했다. “8월 말까지 스케줄이 꽉찼다”고 할 정도로 도쿄 올림픽 유도 영웅이 되어 방송 출연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두 선수를 서울시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두 선수는 한결같이 “즐겼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며 올림픽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지난 7월 29일 일본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100kg급 결승 경기에서 조구함(왼쪽)이 일본 에런 울프를 상대로 패한 뒤 울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연합뉴스

조구함, “울프를 진정한 무도인으로 인정했기에 손 들어줘”

조구함은 도쿄올림픽 남자 유도 100kg에서 은메달을 획득, 자신의 첫 올림픽 메달을 따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장성호의 은메달 이후 17년 만에 100kg급에서 한국 유도에 메달을 안겼다.

조구함의 명장면은 단연 결승전, 일본의 에런 울프와의 대결이었다. 유도 종주국 일본 유도의 심장 무도관(부도칸)에서 일본 선수와 무려 9분 35초의 대혈전 끝에 안다리후리기에 한판패로 무릎을 꿇었다. 세상 누구보다 아쉬웠을 조구함이다. 하지만 조구함은 주저앉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 후 울프의 손을 치켜세우며 승자를 축하해줬다. 이 모습은 패배에 함께 아쉬워하는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이 끝난 뒤 거의 매일 방송스케줄이 있고 갈 때마다 출연진들이 그 얘기를 원한다며 멋적게 웃는 조구함은 “과감하게 공격도 했지만 울프가 내 기술을 워낙 방어를 잘하더라. 9분이나 함께 모든걸 쏟아내면서 ‘실력이 좋아서 날 이겼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울프가 승리 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내 심정이 이입이 되더라. 아마 내가 이겼어도 눈물을 흘리고 기뻐했을 거다. 나도 그랬지만 큰 대회에서 이기면 그동안의 훈련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 마음을 알기에, 강한 상대였기에 축하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울프는 2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제가 이기기도 했고 그때도 강하다고 인정하던 상대였죠.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걸 알고 저도 그랬듯 그도 올림픽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은 걸 알고 실력도 알기에 무도인으로 인정하기에 그렇게 손을 치켜세워줄 수 있었죠. 제가 이겼어도 울프도 똑같이 했을 거라 생각해요.”

또 조구함은 4강에서 포르투갈의 조르제 폰세카가 경기 중 손에 쥐가 나서 고통스러워하자 최대한 그곳으로 공격하지 않고 심판이 공격을 지시해도 물러나 회복까지 기다리는 모습으로 박수를 받았다.

지난 7월 25일 도쿄 지요다구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66kg급 경기 동메달 결정전에서 안바울이 이탈리아 마누엘 롬바르도를 맞아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두고 있다. 연합뉴스

“상대의 부상을 이용해서 이긴다면 그건 떳떳하지 못한 승리라고 생각했다”는 조구함은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난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폰세카가 저에게 패배 후 ‘꼭 금메달을 따라’고 응원해주던데 그 친구도 제 행동을 이해했기에 해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며 웃었다.

올림픽 정신은 ‘탁월함’, ‘우정’, ‘존중’ 총 3가지로 여겨진다. 조구함은 탁월했으며 상대를 존중하며 우정까지 나눴다. 그 모습을 국민들도 똑똑히 봤기에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박수치며 조구함을 ‘올림픽 영웅’으로 기억한다.

안바울, 리우에선 은메달 따고도 울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유도 66kg의 안바울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을 역시 4강전으로 꼽았다.

“‘이것만 이기면 결승에 간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상대가 준비를 잘해왔고 경기의 흐름을 제가 끌고 오지 못했다”고 패인을 분석한 안바울은 “기억나는 순간이 딱 기술을 넣을 기회가 왔는데 그때 제가 멈칫하며 망설였다. 그 망설임의 찰나가 지나자 상대로 되치기로 들어왔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 순간이 준 교훈을 꼭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16 리우 올림픽에서 은메달까지 땄던 안바울은 이번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리우 결승과 도쿄 동메달 결정전 이후 안바울은 똑같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리우 때는 솔직히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사실과 ‘한 수 아래 선수에게 졌다’는 아쉬움의 눈물이 컸어요. 하지만 이번 도쿄에서는 슬프고 아쉬움의 감정보다 다시 올림픽 시상대에 설 수 있다는 감사함과 이긴 순간 저를 도와주고 응원해주신 분들이 갑자기 떠올라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즐겼기에 후회 없다… 파리에선 더 높은 곳에서 웃겠다

두 선수의 인연은 남다르다. 중량급과 경량급이지만 신인 시절 태릉선수촌 룸메이트로 동고동락했다.

게다가 2016 리우 올림픽을 준비할 당시에는 안바울이 체급을 올리고, 조구함은 체급을 내리면서 살을 억지로 찌우고 빼는 큰 고통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리우에서는 안바울만 메달을 따고 조구함은 허무하게 초반에 탈락했는데 이번에는 함께 메달을 땄기에 더 기쁠 수밖에 없다.

안바울은 “리우 때 결승에 올라보니 감정 컨트롤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결승 무대에 오른 (조)구함이 형에게 ‘끝까지 침착하고 차분하게 경기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게 되더라고요.

구함이 형은 정신이 없어서 제 말을 못들었을 수도 있었지만 정말 저는 그때 감정 컨트롤을 잘 하지 못했던 속상함이 떠올라서 정말 그러지 않길 바랐죠”라며 조구함의 결승전 직전 상황을 떠올렸다.

조구함은 “(안)바울이 덕분에 많이 도움됐다”며 안바울의 조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도쿄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조구함(왼쪽)과 동메달리스트 안바울.연합뉴스

그는 “귀국날 버스 옆에 같이 앉아 서로 은메달을 따본 소감에 대해 많이 얘기했어요. ‘지금은 행복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움은 남을 거다’라고 하던데 바울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올림픽만이 주는 느낌, 그리움이 있다.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안바울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에 창피하진 않다. 난 정말 최선을 다했고 리우 때 그러지 못했기에 도쿄에서는 최선은 다하되 즐기려고 했다. 후회 없다”고 했다.

조구함 역시 “방송에 나가서도 ‘금메달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난 은메달로도 행복하다고 당당히 말하고 다닌다”며 웃었다.

인터뷰 내내 두 선수는 이구동성으로 “아쉬움은 분명 남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아쉬움과 후회는 분명 다르다. 이들은 벌써 2024 파리 올림픽으로 향하고 있다.

안바울은 은메달과 동메달, 조구함은 은메달을 따봤기에 이제는 금메달이다. 이들은 “파리 올림픽이 고작 3년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아시안게임도 1년 후다.

3년 뒤면 노련함과 기술은 분명 최대치를 찍을 것으로 본다. 그때 서로 가장 높은 곳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웃고 싶다. 그때도 도쿄처럼 즐기며 결과에 승복하되 도쿄의 아쉬움과 보완점을 잊지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재호 스포츠한국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