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작동하는 유동성불변의 법칙

테이퍼링(자산매입축소)의 소문은 무성하였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이 공급하는 유동성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2021년 1월) 이후에도 여전히 우상향으로 증가하고 있다. (참조: 표1. 美 연준의 보유자산추이)

8월 위기설을 조장하던 일부 시장참가자들이 숨죽이며 지켜봤을 법한 ‘잭슨 홀 미팅’에서도 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조기 테이퍼링에 대한 실효적 언급을 일체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금번 잭슨 홀의 결과를 두고 뜬금없이 아프가니스탄 미군철수의 영향를 들먹이며 연준의 ‘동작 그만’에 대해 억지 짜맞추기 식 일부의 해석은 공허할 따름이다.

우선 표 1에서와 같이 2020년 상반기 미화 4조 달러 수준이었던 연준의 보유자산 규모가 1년여 만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무려 미화 7조 달러(한화 약 8,200조 원)까지 단기 급증한 결과는 사태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공황 이전에 동 수치가 미화 1조 달러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미화 7조 달러에 달하는 연준의 부채규모(=자산규모)를 ‘극단적 과잉’으로 분류하며 경종을 울리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이래 해당 수치는 우상향을 벗어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약 미화 1조 달러(한화 약 1,170조 원)의 유동성이 추가 공급되었다. 따라서 이 같은 패턴에 대한 합리적 해석은 유동성 공급의 두 축인 연준과 재무부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유동성 총량의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있고, 최근에는 유동성 사용처에 대한 질적 변화를 추구하면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진단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급격한 유동성 감축이라는 ‘서든 데쓰’는 현재로서는 이들의 구상에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거칠게 말해 미국 재정·통화정책의 초식은 상당기간 ‘유동성 불변의 법칙’을 근간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유동성 불변의 법칙이 지속된다면 유동성 정책의 시나리오는 사뭇 단순화된다. 예컨대 (a)금리인상은 일부 개시하되 테이퍼링은 시간차를 두고 한참 뒤에 후행하는 시나리오이거나, (b)금리를 손 대지 않는 대신 일부 테이퍼링을 실시하는 경우의 수가 유력해 보인다. 또한 (c)금리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양적완화의 총량만 대환처리 하며 직전 수준을 유지하는 방안도 선택지 위에 놓여있다.

시시때때로 유력인사들의 구두개입을 통한 디레버리지(부채 축소)의 시급성이라는 립서비스는 꾸준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명확해지는 것은 금리인상과 자산매입 축소가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줄었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글로벌 금융시장 관점에서는 금리인상과 자산매입 축소가 동시 전개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제거되는 셈이니, 아직까지는 작금의 자산버블이 금방 꺼지지 않을 환경인 셈이다.

일본에 반전의 시간을 주는 연준의 제자리 걸음

도쿄 올림픽의 위대한 성화는 꺼졌지만 신화는 부활되지 못했다. 코로나19와 경기불황이라는 이중고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패전에 할복을 택하는 사무라이처럼 1년만에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일본이 깨어날 절호의 기회이다.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에 관한 유동성 유지 기조가 일본의 경제 회복에 가장 필요한 변수인 ‘시간’을 벌어주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준은 초저금리 기조를 급변시키지 않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고, 미국 재무부는 유동성 총량을 상당기간 유지한 채 재정정책에 있어 전대미문의 확대재정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미래자산이 되는 중장기 인프라 투자확대, 지속력 있는 일자리 창출 등으로 유동성의 사용처에 변화를 꾀하고 있을 뿐 앞으로도 상당기간 전세계 정부계정의 투자는 미국이 선도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비록 위기 시 처방전인 ‘묻지마 유동성 공급’ 카드는 버렸다지만 여전히 특정 목적에 유동성을 할당하는 것에는 돈 쓰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은 연준의 전략적 제자리 걸음의 시기를 잘 활용하여 신속히 리더십의 재정비를 이뤄야 한다. 병마를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선 아베 신조와 코로나19와 올림픽 실패를 책임진 스가는 이미 과거지사이어야 하고, 이들은 섭정을 멈춰야 한다. 새 리더십은 부자 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과거의 영화를 재현할 지를 솔직하고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2020 도쿄 올림픽의 데미지 컨트롤(상황관리)에 전력을 다했던 스가 내각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며 퇴장했다. 돌이켜 보면 201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서 ’미래를 위한 스포츠‘의 기치를 앞세운 도쿄를 선택하였을 때, 아베 당시 총리는 기뻐서 펄쩍 펄쩍 단상을 뛰어다녔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일본의 2차대전 패전의 극복을 만방에 알린 상징이었듯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아베노믹스’의 상징으로 삼아 일본경제의 재도약을 진심으로 희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관중 없는 올림픽이라는 불운 등에 일본은 한화 20조~100조원 가량의 빚더미에 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비와 간접비에 대한 구분계리의 난해함으로 그 추정치의 편차가 심하지만 올림픽 개최라는 특성상 1회성이고 휘발성 높은 항목에 상당한 낭비가 부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그 박탈감도 깊어 일본은 경제적으로 집단 우울증에 빠져있다. 총리의 사직은 당연하다.

한국 기준금리 인상이 신임 총리에 부담될 수도

한때 일본에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보다 한참 높았던 황금기(참조: 표2. 한미일 1인당 GDP 추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고대신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1995년도에 일본의 1인당 GDP는 무려 4만3,428 달러를 기록했고 이는 당시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2만8,690 달러)보다 무려 약 51%나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의 동 년도 해당 수치가 일본 대비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한 1만2,564 달러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90년대 일본은 가히 전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무적의 황금기를 구가했음이 증명된다.

물론 1985년에 이뤄진 플라자 협정에 따른 급격한 일본 엔화절상이 달러가치 환산기준의 GDP에 급격한 착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일본은 당시 자국통화인 엔화의 국제적 발언권이 최대치로 올라간 골디락(고성장에도 물가상승 압력이 없는 상황) 국면이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일본은 갑자기 늘어난 엔화 구매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규모 해외쇼핑, 묻지마 부동산 투기 등 졸부의 전형을 보이며 황금기를 낭비한 원죄가 이어지며 잃어버린 30년을 낳았다.

2020년 기준 일본의 1인당 GDP가 여전히 4만 달러 수준임은 아직도 1995년 수치보다 낮은 것임은 물론이고, 경쟁국 한국이 3만1,637 달러로 일본의 약 78% 수준으로 턱밑까지 치고 오르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보여준다.

따라서 누가 일본의 신임 총리가 되든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왜 일본이 약 30년간 정체기를 겪었는지 반성하는 것이다. 단기 성과에 욕심을 둔 전임자들이 빠졌던 대표적 유혹인 (a)엔화의 약세를 통한 수출경쟁력 강화와 (b)휘발성 높은 재정집행의 남발로부터 거리를 멀리 둬야 한다.

특히 재정이란 앞선 세대의 돈을 가불하여 현 세대가 당겨 쓰는 것인데도 지금과 같이 지방자치제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경우 이른바 지방 호족들로 구성된 특정파벌만 배부르게 만드는 ‘밑빠진 독’이 된지 오래다. 이에 21세기판 대정봉환(大政奉還: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이라도 단행해 재정집행에 관한 강력한 중앙통제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시대에 지역별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재정집행의 중앙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 난치병을 시급히 다스리지 않는 한, 국가가 부자인 것과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영원히 합치되지 못한다.

반전의 마법을 펼칠 시간이 길게 남지도 않았다. 언제든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사이클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연준이 금리인상을 개시하게 되면 세계경제는 유동성 축소에 따른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 이웃나라 한국이 기준금리를 0.25% 인상하며 유동성 축소관리에 나선 것도 신임 일본 총리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징조일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제국이 경기불황과 코로나19사태에 맞서 집 나간 인플레이션이라도 꿔다 앉혀 놓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터에, 경기 정상화 및 보복소비까지 맞물리게 되는 경우 인플레이션 시대로의 회귀는 필연이고 생각보다 빨리 도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테크이든 재테크이든 본질을 벗어난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업이 잘되는 경우가 없듯이, 일본도 경제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발 더 나아가서 혐한 정책과 수출규제도 풀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하기를 권고한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사람간의 거리, 이종 문화간의 거리가 유사이래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지금, 격동격변기의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재정립함이 공통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첩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신임 일본 총리가 아직은 열려있는 윈도우를 활용하여 큰 반전의 베팅을 걸기를 바라고 또 성공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한국 경제가 일본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고 20여년을 선행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문수 Aktis Capital(Hong-kong) 최고 투자책임자(CIO)

1995년 골드만삭스(홍콩)에 입사한 이래로 20여년간 홍콩기반 아시아 전문 투자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후 산업은행 딜링룸에서 국제금융을 익히고 씨티은행, 메릴린치 등 유수 투자은행에서 국제채권, 외환, 파생상품 및 M&A등을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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