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주유소. 일부에서는 원유값이 배럴당 200달러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폭풍이 전 세계 에너지와 식량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충돌이 강대강 행보를 이어가면서 전 세계의 인플레이션 위협을 높이고 개발도상국과 식량 외부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정치적 위기까지 불러올 것이라는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연일 치솟는 유가, 파국으로 향하는 에너지 위기

우크라이나 사태가 시작되며 예상된 유가 급등은 미국의 강경한 자세와 러시아의 맞불이 이어지며 현실이 됐다.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규제가 발표가 더해지며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유럽 북해산 브렌트유는 연일 급등했다. 미국의 휘발유 값은 갤런당 4.3달러를 돌파한 상황이다. 미국 휘발유 값이 4달러를 넘어선 건 10년만의 일이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갤런당 1.7달러까지 하락했던 데 비하면 미국 내 유가 급등은 소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유류세 인하를 단행한 한국과 그렇지 못한 미국 유가는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차량 소유와 주행 거리가 많은 미국인들에게 유가 상승은 예사롭지 않다. 패트릭 드한 개스버디 분석가는 “최근과 같은 유가 급등 속도는 유례가 없다”고 전했다.

일부에서는 원유값이 배럴당 200달러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경우 미국 휘발유 값은 갤런당 5.8달러까지 급부상할 전망이다. 이는 2008년 유가 급등시 기록한 5.37달러 기록을 깨는 수준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정부 차원에서 유가를 낮출 대안이 제한적이다. 유가 상승의 부담이 고스란히 가계와 기업으로 향한다.

인플레이션 우려도 더욱 심화하고 있다. 지난10일(현지시간) 발표된 2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7.9%에 달했다. 최근 유가 급등이 반영되면 상승률은 더욱 치솟을 것이 확실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민도 커질 수밖에 없다. 리코 루먼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연료값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가 급등은 미국만의 문제일 수 없다. 유럽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비중이 3%에 그치지만 유럽은 러시아 의존도가 높다.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제한 발표 후 영국을 제외한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들이 동참을 주저하는 이유다.

유럽의 대(對)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미국이 러시아산 석유류 수입 금지를 언급하자 유럽시장에서 천연가스 값은 장중 메가와트시(MWh)당 345유로에 달했다. 미국 경제 매체 쿼츠는 “이는 영국 기준에서는 유가 600달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미국이 유가 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산유국의 증산 유도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 비협조는 뼈아프다. 인권 문제를 앞세운 외교 정책이 조 바이든 정부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바이든 정부가 이란 핵합의 마무리를 통해 이란산 원유 공급을 하더라도 기존 중동 산유국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 이후 앙숙 관계이던 주요 산유국 베네수엘라와 관계 개선에 나선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에너지 급등 이어 인플레이션과 맞물리는 식량 위기

이번 사태가 식량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암모니아, 칼륨, 인산염 등 비료는 천연가스를 원료로 생산된다. 이번 사태로 제재의 영향을 받는 기업에는 러시아의 우랄칼리, 유로켐, 포스아그라 등 비료 기업들도 포함된다. 이들 기업들이 생산한 비료 공급이 제한되면 당장 전 세계 식량 생산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자국산 곡물 수출을 제한한 상황도 국제적인 식량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는 올해 연말까지 밀, 귀리, 수수, 메밀 수출 금지를 결정했다. 러시아 역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전쟁과 서방의 제재로 인한 인플레이션 충격을 완화하면서 제재에 대한 맞불로 식량 수출 중단이 이뤄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의 곡창지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밀과 보리가 전세계 생산량의 약 25%를 차지한다. AP통신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제한이 유럽·아프리카·중동 아시아의 식량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조치라고 평가한 까닭이다.

중동의 경계심은 특히 크다. 이집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밀을 수입한다. 튀니지는 수입 밀의 절반을 우크라이나에서 공급했다. 이들 국가에는 밀이 생존의 문제다. 이집트의 경우 코로나19 사태 이후 지난해 말까지 빵값이 80%나 상승했다. 정부 보조금이 포함된 빵값도 인상이 예고됐다. 레바논의 상황도 비슷하다.

아베르 에테파 세계식량계획(WFP) 대변인은 “중동과 아프리카 등 개도국의 식량 상황이 특히 중요하다”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해온 이들 지역 국가가 곡물 수입선을 변경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ING는 중동국가에 식량 위기가 발생하면 정치 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중동에서 새로운 ‘아랍의 봄’ 시위 발생 가능성을 예상한 것이다.

이를 감안해 주요7개국(G7)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식량 위기를 다룰 긴급 회의도 개최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빈자리를 캐나다, 호주가 채울 수 있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곡물 운송 거리가 늘어나는 만큼 비용이 늘어난다. 유가 급등은 비용을 더욱 키우는 요인이다.

이미 대처가 늦었다는 진단도 있다. 캐나다의 경우 이미 밀이 아닌 다른 작물 파종이 시작된 만큼 조기에 밀 생산을 늘리기 어렵다. 밀 외에 우크라이나가 17%의 비중을 차지하는 옥수수 역시 해법을 찾기 어려울 전망이다. 사료와 에탄올 생산 원료로 쓰이는 옥수수 값 상승은 육류값 상승과 유가 상승의 또 다른 요인이 된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