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정완주 국장] PBA는 매년 새 시즌마다 2부투어인 ‘드림투어’의 상급자를 수혈한다. 지난해에도 드림투어 상위 랭커 15명이 PBA 1부투어로 올라갔다. 드림투어 스타인 권혁민(43) 선수는 ‘7전8기’의 사투를 뚫고 오는 5~6월께 새 시즌에 들어갈 PBA 1부리그 합류가 확정됐다. 지난해 11월 ‘2021-22 프롬 PBA 드림투어 개막전’에서 대망의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권혁민과 PBA의 인연은 순조롭지 않았다. PBA가 출범할 당시 우수한 선수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대한당구연맹 소속 상위 40위까지는 2년간 1부투어를 참가할 수 있는 시드가 배정됐다. 하지만 권혁민의 연맹 랭킹은 41위. 단 한 끗 차이로 시드를 받지 못하고 험난한 2부리그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는 PBA 진출이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고 회고한다.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이후 계속 간발의 차이로 1부투어 진출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가슴 속에 울화가 점점 쌓이기만 했어요. 예전에는 대회에 나가서 게임을 하는 것 자체가 즐겁기만 했는데 갈수록 재미도 없어지고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거죠. 연습을 하고픈 의지도 사라지면서 점차 무기력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아내와 두 딸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 제대한 23살 청년, 생계를 위해 큐를 놓다

권혁민의 당구 인생은 당구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의 당구장을 들락거리다가 12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큐를 잡았다. 상당한 고점자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흥미와 재미를 갖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연습에 매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연습 시간을 쏟아 부은 시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는 이미 당구 고수라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해 당구를 즐기던 선생님들이 따로 불러 한 수 가르침을 요청할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구 외에는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한 권혁민은 군 입대를 선택했다. 군대에서도 자연스럽게 그의 당구 실력은 소문이 났다.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마침 지역 체육대회가 열렸어요. 동면, 서면, 남면 등으로 나눠서 대회가 진행됐는데 저는 동면 소속으로 출전했습니다. 규정에는 지역주민이나 군 간부만 출전이 가능했는데 사병 신분의 저를 부사관으로 속인 다음 출전시킨 거죠. 처음에는 3쿠션 선수가 따로 있다고 해서 4구 선수로 나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연습 때 3쿠션 선수와 붙어서 일방적으로 이기는 바람에 제가 3쿠션 선수로 나갔죠.”

비록 지역 체육대회였지만 당구 대회는 강원도당구연맹 소속 선수들이 참가했다. 수준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권혁민은 정식 선수들과 맞붙어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달성했다. 복식대회도 나가 준우승을 차지해 군에서 포상휴가까지 받았다. 당구를 통해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군 제대 이후였다. 생계를 위해 당구를 택하기에는 그 당시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 정식 선수로 등록을 해도 생계는 막막했고 용돈벌이는 대부분 내기당구의 일종인 소위 ‘죽방’을 통해 조달하는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죽방을 좋아하고 즐기기도 했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당구 인생을 접는 결단을 내렸다.

“제대할 당시 나이가 23세였는데 정말 막막했어요. 진지하게 인생을 고민했는데 ‘도저히 당구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 밖에 나지 않았죠. 생각을 정리하자 바로 큐를 놓고 당구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업을 위해 개인사업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중고차 딜러부터 노래방까지 여러 가지 사업을 전전했지요.”

개인사업 전전하다 35살에 다시 잡은 큐

권혁민은 지금의 아내를 30살 때 처음 만나 5년의 긴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했다. 그때까지 그는 아내에게 당구의 ‘당’자도 언급하지 않고 개인 사업에만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당구 대회가 중계되는 것을 우연히 시청했다. 당구가 한물 간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몸 속 깊은 어느 곳에선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당구에 대한 열정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내에게 당구장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해보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당구와 함께 살아온 내력이나 실력을 당연히 알지도 못했으니 반응이 시큰둥했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라 계속 아내를 설득했지요. 그리고 14년 만에 다시 큐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권혁민은 인근 당구장부터 찾아갔다. 녹슨 큐를 다시 휘두르기 위해서는 현재 실력을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당구장 사장한테 4구 300점 정도 치면 대대는 몇 점 놓느냐고 물었어요. 중학교 때 이미 4구 1000점을 놓았지만 당구를 치지 않은 기간이 너무 길어서 그 기준을 들이댄 거죠. 20점을 놓으라고 했지만 자존심 상 22점으로 올려 25점을 놓는 사장님하고 게임을 쳤는데 10판 내리 졌어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22점짜리 스트로크가 아니라면서 당구가 짜다고 평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1승을 하면 바로 점수를 올리겠다고 선언했죠.”

한 달 후 권혁민은 바로 25점으로 올린 뒤 다시 한 달이 지나자 30점을 놓았다. 당시 선수들은 대대점수가 35점이었고 정상급 아마추어 점수가 보통 30점이었다. 큐를 다시 잡은 뒤 두 달 만에 경기력을 끌어올린 그는 각종 동호인 아마추어 대회를 섭렵하면서 우승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선수 등록에 대한 열망도 커져갔다. 부천당구연맹을 찾아갔다. 지역 당구연맹에서 주최하는 평가전 형태의 대회에서 상위권 입상을 하면 선수등록이 가능해서다. 그 때가 2014년이다.

“부천당구연맹 대회는 등록선수와 아마추어가 겨루는 오픈 대회였는데 거기서 제가 덜컥 우승까지 해버렸어요. 기분이 좋더라고요. 바로 선수 등록을 한 후 토너먼트인 경기도 3쿠션 챌린지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줄 곧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경기도만 해도 당시 강동궁, 김행직, 황득희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권이어서 상위권 진입이 만만치 않았다. 갓 등록한 늦깎이 선수가 그 틈을 비집고 우승권을 넘본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권혁민은 성공적인 선수 등록에 이어 꿈에 그리던 당구장도 개업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공플레이어’ 간판을 단 당구장을 드디어 연 것이다. 당구장 매출은 쏠쏠했다. 그리고 소중한 인연도 이어갔다. 당구장에 놀러 온 여고생 2명에게 당구 선수를 권유한 것이다. 현재 LPBA에서 활약하고 있는 서한솔, 허지연 선수가 그 당사자다.

드림투어 스타인 권혁민 선수는 오는 5~6월께 새 시즌에 들어갈 PBA 1부리그 합류가 확정됐다. 사진=이혜영 기자
국내 최대 당구장 ‘자이언트 당구클럽’을 열다

권혁민은 PBA 출범으로 당구 열기가 확산될 것을 예상해 동네 당구장 수준을 뛰어 넘는 초대형 당구장 사업을 구상했다. 당구용품 사업까지 염두에 뒀다. 평소 당구를 즐기던 고등학교 친구를 설득해 동업 형태로 개장한 곳이 경기도 고양시의 ‘자이언트 당구클럽’이다. 2019년 문을 연 자이언트 클럽은 총면적이 1,322㎡(400평)에 달한다. 대대만 25대를 비치했고 중대 4대, 포켓볼 6대를 같이 구비한 국내 최대 규모의 당구장이다. 투자비만 보통 당구장의 3배를 넘는 10억원에 달한다.

파격적인 요금제도를 도입해 보다 많은 동호인들이 저렴한 게임비용으로 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구도도 만들었다. 망해가던 당구장이 주로 도입한 ‘6.6제’ 시스템을 과감하게 자이언트 클럽만의 요금제로 도입한 것이다. 영업이 부진한 당구장은 일정 요금만 내면 하루 종일 당구를 즐길 수 있는 ‘정액제’를 활용한다. 또는 각자가 입장료 6000원을 낸 후 경기에 패배한 사람이 게임비 6000원을 부담하는 6.6제를 적용해 손님을 유치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클럽은 처음부터 이 요금제도를 도입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이언트를 처음 구상할 때부터 ‘6.6제’라는 요금제를 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입장료가 쌓여 있으니 실제로 게임 비용이 내려가는 효과가 있어요. 보통은 고수가 이길 확률이 높아 고수는 하루 종일 게임을 쳐도 한 푼의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는 구조인데 참가비를 함께 부담하게 한 것이죠. 그래야만 고수와 하수의 경기 매칭이 원활해지고 많이 경기를 치를수록 비용이 저렴해지는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6.6제를 도입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매머드급 당구장은 성공적이었다. 한 달 매출이 1억원을 찍을 정도였다. 당구 보유대수가 많을수록 게임을 치르는 횟수가 많아야 수익이 늘어날 수 있다. 6.6제 요금제도는 이 구조를 충족시키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자이언트 클럽은 이후 입소문이 나면서 굵직한 대규모 대회 장소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전국 종별학생당구선수권대회’는 물론 고양시당구연맹(회장 임윤수) 정기평가전도 열린다. 공무원 200여명이 모인 ‘중앙행정기관 당구동호인 대회’도 유치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자이언트 클럽은 개업 6개월 만에 위기를 맞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영업제한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혹시나 하는 ‘데자뷔’ 현상을 가져왔다고 토로했다.

“자이언트 클럽은 이전에 허정한(경남당구연맹) 선수가 운영하던 ‘엔조이쓰리칼라 당구클럽’을 인수한 것인데 그 클럽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치명타를 맞아서 결국 문을 닫은 셈이거든요. 그래서 코로나19가 터지자 불길한 생각이 먼저 들 수밖에 없었죠. 영업제한이 시작되면서부터 매출은 급감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고 영업을 정산할 때마다 입술이 타들어갔다. 이러다가 거액을 투자한 당구장 사업을 말아 먹고 거리로 나앉게 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웠다. 자신만을 믿고 있는 아내와 소중한 두 딸의 모습도 매일 어른거렸다.

“정말 다행인 것은 매출이 빠지다가 어느 선에서부터 멈추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어요. 그 수준이면 임대료를 지불하고도 직원 수를 일부 조정하면 운영비를 얼추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이나 당구장을 찾는 손님들도 걱정과 함께 응원을 많이 해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됐죠.”

인생의 목표는 두 딸을 당구 선수로 키우는 일

권혁민은 연년생인 6살, 5살의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아직 당구를 알지 못하는 어린 나이의 딸들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당구를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당구선수로 키우고 싶은 나름의 철학도 확고했다.

“당구 자체가 건전한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험한 운동이 아니어서 부상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게 가장 큰 장점이죠. 사실상 정년도 없는 편입니다. 몸 관리만 잘 하면 늦은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가 있죠. 저만 해도 40살이 넘은 중년이지만 당구 선수로서는 전성기 나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운동을 하는 여성의 경우 결혼하고 출산하면 선수로서 경력이 단절되는데 당구는 얼마든지 복귀가 가능한 종목이죠. 그래서 10살이 되는 해에 당구를 가르치기 시작해서 15살 정도에 국내 ‘톱’ 수준으로 키워 보는 것이 제 꿈입니다.”

군 입대 후 14년 만에 다시 큐를 잡은 그의 당구인생은 PBA 새 시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권혁민의 롤모델은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이다. 새 시즌이 시작되면 우상인 쿠드롱과의 대결도 이루어진다. 국내외 정상급 선수들과 맞대결을 펼쳐 명승부를 연출한 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이 기대된다.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