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가 아닌 ‘귀여움’으로 정치인 ‘덕질’…정치인 팬덤 문화 바뀔까

6일 서울시 성북천 분수광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성북·강북의 변화와 새로운 미래! 이재명이 앞장섭니다!' 성북·강북 유세에서 한 지지자가 '절박재명 그간 날조에 속아서 미안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주간한국 장서윤 기자]방송가의 ‘마이다스의 손’인 나영석PD는 수년 전부터 “곧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덕후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이라는 예측을 종종 해왔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어떤 분야에 크게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팬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들이 특정 대상에 몰입해 그와 관련한 것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것을 ‘덕질’이라고도 한다. 나 PD의 말은 이런 ‘덕후’들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곧 온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덕후란 표현과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정치 영역에까지 확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정치인 이재명을 둘러싼 아이돌 커뮤니티의 ‘덕질’ 최근 대선에서 낙선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2030 세대들의 지지 흐름이 바로 그렇다. 이 고문은 이번 대선에서는 석패했지만, 선거 막판 청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가 얻은 1614만7738표는 민주당 대선 역사상 최다 득표이기도 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대선 이후에도 이 고문이 청년층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대선에 패배한 후에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과 달리, 이 고문은 반대로 팬까페 등이 생겨나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민주당은 신규당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젊은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20대 대선 직후인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11만7700명이 신규 권리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충북도당의 경우 신규 가입자의 70%가 젊은층 여성이다. 대선이 끝난 지난 10일 개설된 네이버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 회원수는 일주일만에 10만명을 넘어서더니 25일 현재 14만6000여명을 기록 중이다.

특정 커뮤니티에서 정치인이 ‘스타’가 되는 일은 종종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현재 이 고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팬층은 바로 아이돌 ‘덕질’에 정통한 2030 여성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젊은 ‘덕후’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는 지난 대선 막바지부터 이 고문에 대한 팬덤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이렇게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정치인에 대한 젊은층의 지지가 두드러졌던 예는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지지 행태가 이전의 정치인에 대한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돌 덕질’이 ‘정치인 덕질’로 옮겨진 듯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이 고문을 ‘재명 아빠’ 자신들을 ‘개딸’이라고 지칭한다. ‘개딸’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성동일이 성격이 괄괄한 자신의 딸(정은지 분)을 가리켜 부르던 단어다.

이들이 대선 때 들고 나온 구호 또한 ‘간절재명’ ‘절박재명’ ‘쏘리재명’ 등 명확하면서도 위트가 가득하다. 이 고문을 친칠라에 비유하는 등 인터넷상에서 ‘밈’(meme·유행하는 이미지 및 영상)을 끊임없이 생산하면서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들은 과거 성남시장 당시 이 고문이 장애인을 박대했다고 알려진 영상의 앞뒤 상황을 재조명하며 적극 해명하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증오와 혐오’ 배척하는 새로운 정치 팬덤 문화 눈길 이에 대해 김영대 문화평론가는 지난 16일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대선 내내 상대에 대한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비호감 선거만 반복됐는데 이 고문에 대한 긍정적인 ‘덕질’ 양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단일화 이후”라며 “덕후들의 세계에서는 연약함(취약성)과 귀여움을 찾으면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는 포인트인데 단일화가 그런 지점이었다”라고 분석했다.

또 “덕질이란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순수한 호감을 바탕으로 한 긍정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덕질의 세계에서는 부정적인 흐름이 긍정적인 흐름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전했다.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지지가 아이돌 덕후 커뮤니티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아이돌 덕후 커뮤니티가 가장 주력하는 일은 바로 ‘스타 키우기’다. 특히 이미 스타가 된 이들보다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나 데뷔를 앞두고 있는 예비 신인들을 응원하고 이들의 인지도를 높여 마침내 스타로 ‘키워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정치인을 향한 ‘키우기 덕질’로 이어질 것인지가 관심의 대목이다.

그리고 이같은 덕후들의 열정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숨어있다. 이에 대해 박시원 한류 전문 마케팅 컨설턴트는 “덕후들 사이에서는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덕질’은 특정한 의도나 목적달성을 위한 당위성이 아닌, 누군가를 순수하게 ‘귀여워서’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수 호감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다”고 분석했다. 지금의 ‘이재명 현상’은 이런 덕후들의 호감을 기반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다른 정치인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느냐다. 일반적으로 정치인 팬클럽은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혐오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하지만 아이돌 커뮤니티의 특징은 정치인 팬클럽의 부정적 여론몰이 방식을 배척한다. ‘재명이네 마을’ 팬카페의 경우 아이돌 커뮤니티의 운영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혐오적 표현의 금지, 타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네거티브 지양 등을 운영 방침으로 삼는다.

정치 관련 커뮤니티는 지금까지 극단적인 팬덤 현상으로 많은 부작용이 지적됐다. 다만 최근 아이돌 커뮤니티의 이재명 덕질이 순수한 지지 추세가 계속 유지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긍정적 팬덤 문화가 정착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증오와 혐오가 배척된 커뮤니티의 지지가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장서윤 기자 ciel@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