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선수 강민구가 29일 충북 청주시 오창읍 죽빵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혜영 기자 )
프로당구 PBA가 출범하자마자 탄생한 최고의 ‘깜짝 스타’는 강민구(39.블루원엔젤스) 선수다. 당구 팬들한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 선수가 2019년 PBA 개막전 파나소닉 챔피언십 남자부 결승전까지 올라간 것이다. 결승전의 상대는 천재적 기량을 자랑하는 그리스의 강자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 선수. 이름값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났던 강민구는 풀세트 접전 끝에 4대3의 아쉬운 분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로 명승부를 펼쳤던 결승전 이후 강민구의 당구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는 이후 3차례 더 결승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마지막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해 ‘준결승의 사나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특이한 점은 결승전 상대가 모두 외국 선수라는 것. 카시도코스타스와는 4번째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다. 2번째 결승은 프레드릭 쿠드롱(웰컴저축은행), 3번째 결승은 하비에르 팔라존(휴온스)과 맞붙었다. 하필이면 결승 때마다 상대 선수들이 역대급으로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이는 불운이 겹친 것이다.

가정 형편으로 접은 미국 유학...원래 꿈은 가수

강민구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음악을 평소 좋아해 중학교 때 성악을 배우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예술고등학교 진학까지 염두에 뒀다.

“가수를 하고 싶어서 예술고 진학을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절대 가수를 허락할 수 없다면서 노발대발 반대를 하셨죠. 결국 예술고는 포기하고 실업고등학교로 가서 댄스부 활동으로 아쉬움을 달랬죠.” 강민구가 당구를 처음 접한 것도 댄스부 친구들과 재미 삼아 당구장을 찾은 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4구 기준 200점 정도 실력이다 보니 처음 큐를 잡아 본 그는 매번 게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자꾸 지니까 약이 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방과 후 몇 시간씩 혼자 연습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300점, 두어 달 후에는 500점 수지가 됐죠. 그 후에는 친구들과 왼손으로 게임을 쳤습니다. 오른 손으로 하면 상대가 안 되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구 수지는 700점이었다. 주변에 상대가 없을 만큼 고점자가 됐지만 딱히 당구를 더 칠 생각은 없었다. 졸업 후 아버지의 사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강민구의 당구 인생은 24살 무렵 친구들과 모처럼 간 당구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왼손 으로 친구들을 상대해주면서 가끔 오른손으로도 치는 모습이 당구장 사장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사장은 “이런 거 쳐봤나?”라며 국제식 대대를 보여줬다. 선수들이 사용하는 대대가 마냥 신기했던 강민구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라 사장과 몇 게임 쳤는데 형편없이 패했다. 그 당구장 사장이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충북당구연맹 김윤석 회장이었다.

“김 회장님이 운영하는 당구장에는 대대 기준 30점 수준의 선수나 고점자들이 유독 많았어요. 처음에는 호기롭게 경기를 붙었지만 매번 지는 일이 반복됐죠. 은근히 열도 받으면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요. 중대에서 치던 대로 감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 나만의 뭔가를 정리하기 시작한 거죠. 시스템 연구를 하면서 이런 배치를 이렇게 숫자를 대입하니 이게 맞네, 그러면 이렇게 대입해도 맞겠네...뭐 이런 식이죠.”

당구선수 강민구가 29일 충북 청주시 오창읍 죽빵당구클럽에서 진행된 스포츠한국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혜영 기자 )
강민구의 시스템은 독학으로 연구한 자신만의 체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론과 현실의 괴리였다.

“처음에 책을 사서 파이브 앤 하프(F&H) 시스템을 공부했는데 막상 쳐보면 이론하고 잘 맞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내 방식만의 시스템을 정립하기 시작한 겁니다. 1년 여 동안 맹연습에 들어가 시스템을 내 나름대로 장착한 다음부터 실력이 훌쩍 늘게 됐죠.”

실전에서 검증을 한 후 2005년 충북당구연맹에 바로 선수 등록을 했다. 충북 지역 대회에서 한 달 뒤 준우승을 한 후 내리 5연속 우승을 하는 등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귀국 후 5년간 인생 밑바닥 경험...막노동, 알바 등으로 생계 꾸려

아버지의 사업이 탄탄하게 잘 되고 있어서 크게 부족한 것이 없었던 강민구는 선수 생활의 재미를 만끽했다. 하지만 당구에 빠진 아들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의 집요한 작업이 시작됐다. 해외 유학을 보내 공부를 더 시키고 싶은 일념이었다.

강민구는 계속 이어지는 아버지의 유학 권유에 반발하면서 버텼다. 수시로 아버지와 충돌이 반복됐다. 그러나 그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가 그의 고집을 꺾었다. 담도암으로 투병생활 중이었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강민구를 입원한 병실로 부른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등으로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평생 농사를 지은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소원이 손자인 제가 공부를 더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버지와는 달리 할아버지한테는 대들 수가 없더라고요. 할 수 없이 바로 승낙을 해버렸죠. 그러고 나서 일주일 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때 그의 나이가 28세였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일주일 만에 강민구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학연수를 거친 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럿 퀸즈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유학 생활에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던 그는 2년 뒤 유학 지원이 당분간 어려워졌으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확장한 사업이 급격하게 악화된 탓이다. 당초 6개월 정도 휴학을 하면 될 것 같았지만 결국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졌다.

서른 나이의 강민구는 막막했다. 당장 생계도 문제였다. 할 줄 아는 것은 당구였지만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제법 모아 놓았던 돈을 부모님께 맡겼는데 그마저도 아버지 사업 자금으로 이미 소진된 상황이었어요.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거죠. 닥치는 대로 알바를 구했고 단돈 1만원이 궁해서 막노동까지 나갔어요. 틈나는 대로 당구도 다시 시작했는데 충북당구연맹 측하고 좀 불화가 있어서 선수로 다시 등록하지는 않았어요. 지인들과 ‘죽방’ 당구를 치면서 용돈을 충당했습니다. 그 기간이 5년 동안 이어졌는데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희망이 없던 시절이었죠.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 배를 타려고 알아보기도 했죠.”

강민구가 시련의 시기를 겪었던 그 시절 죽방 당구로 맺어진 인물 중 몇몇은 낯익다. 당구 유튜버이자 PBA 초청 선수로 화제를 몰고 다닌 해커도 그 중 한 명이다. 이밖에 최완영(전북당구연맹), 정재권(PBA) 선수 등도 자주 어울린 멤버들이다.

2017년 강민구는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 생계에 허덕이다 보니 더 좋은 성적을 위해 목표 의식을 가진 선수 생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대회가 열리면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강민구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소식이 들려왔다. 프로당구 출범 소식은 그에게 사막의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PBA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전혀 고민을 하지 않고 옮겨왔습니다. 잘만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계기가 되겠다 싶었던 거죠. 상금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뱅크샷을 2점제로 한다는 새로운 룰이 흥미를 끌었죠. 뱅크샷은 좀 자신이 있었거든요. 개막 경기를 앞두고 3개월 동안 뱅크샷을 포함해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결승전에 올라갔어도 막상 떨리기 보다는 그냥 너무 좋기만 했어요. 이런 큰 무대에서 결승까지 올라온 제 자신을 보며 희열을 느낀 겁니다.”

자신만의 시스템 정립해 강자들의 장점 흡수

강민구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외국 선수는 쿠드롱,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카시도코스타스 등이다. 쿠드롱은 공의 구사력과 컨트롤, 야스퍼스는 침착하고 냉정한 마인드, 카시도코스타스는 정교함이 뛰어나다. 이 선수들의 장점을 다 흡수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국내 선수 중에서는 조재호(NH농협카드) 선수가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다. 사적인 친선 게임이든, 공식 경기든 강민구는 조재호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20년 제1회 세파스배 서울당구연맹 그랑프리 오픈 캐롬3쿠션 대회 4강전에서 처음으로 우상을 꺾었다.

강민구가 정립한 시스템은 유형별로 20여 개가 넘는다. 그는 종종 주변에서 감각 위주의 스타일이라고 오해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직접 체계화한 시스템을 의존한다고 한다. 감각으로 풀어야 할 난구를 제외하면 시스템을 적용해 경기에 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다른 선수와 자연스럽게 노하우를 교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에디 레펜스(SK렌터카) 선수와의 일화이다.

“최근 경기를 마치고 레펜스 선수가 연습을 하고 있어서 옆돌리기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는 지를 물어봤어요. 레펜스의 옆돌리기는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거든요. 그랬더니 너무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실제로 해보니 제 스타일하고 딱 맞아서 정확하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자 레펜스가 원 뱅크 방법을 물어봐서 제가 갖고 있는 몇 가지 시스템을 알려줬더니 정말 좋아하던데요.”

후배들을 양성하면서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잊고 있던 기본 시스템을 다시 정립하면서 그동안 놓쳤던 점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다. 지금 상태에서 예전 시스템을 적용할 경우 또 다른 해법을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나온다.

강민구의 제자는 전애린(NH농협카드) 선수를 꼽을 수 있다. 당구용품 빌킹사 소속이 같았던 인연으로 전애린이 부탁을 해 2년 동안 가르쳤다. 남자 후배 2명도 현재 레슨을 해주고 있다.

강민구는 당구 테크닉을 전수하는 것보다 경기에 임하는 매너, 루틴, 자세 등을 먼저 가르친다. 자신의 실수를 후배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2017년 청주 월드컵3쿠션 대회 때의 일이다.

“32강전에서 터기의 루피 체넷 선수와 승부차기까지 갔어요. 체넷이 2점을 치고 저는 1점을 친 뒤 무난한 공이 배치됐어요. 그런데 실수로 놓치는 바람에 패했어요. 실수를 하고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 큐대를 바닥에 쾅 내려찍었죠. 그러자 친한 베트남 선수가 농담조로 그런 행동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완곡하게 충고하는 데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 이후 경기 매너에 더 신경을 썼고 후배들한테도 그런 부분부터 먼저 가르치게 된 거죠.”

강민구는 카시도코스타스와의 경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술회한다.

“분명히 더 쉽고 확률이 높은 길이 있는데 그 선수는 다른 길을 선택해요. 공격에 실패했을 때 수비를 고려한 선택이었던 거죠. 공수를 확실히 구분하는 운영방식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선수와의 경기에서도 다양한 스트로크를 사용하는 법을 보고 제가 부족한 점을 깨닫기 시작했죠. 저는 모든 공을 간결한 스트로크만으로 해결했는데 상황에 따라 부드러운 팔로우샷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 등을 배운 겁니다.”

지금도 그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기존 스트로크와 개선된 스트로크 구사의 사용비율이 현재 6대4 정도가 될 정도로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5대5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애버리지는 1.8을 목표로 한다. 이런 보완을 거치면 빠른 시일 내에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당구 실력을 늘리기 위해 연습에 매진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채비도 갖췄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연습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는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승을 위해서는 필요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공인구인 헬릭스를 개인적으로 3벌 구입을 했어요. 실제 경기에서 공이 뻣뻣하거나 미끄러운 경우, 또 평범한 경우를 가정해 연습하려고 합니다. 공 상태에 따라 시스템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변수들을 최소화하려는 거죠. 물론 꽤 힘든 과정을 거치겠지만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생활고에 시달려 막노동도 불사하고 배까지 타고자 했던 강민구. 그의 당구 인생은 PBA가 출범하면서부터 새롭게 부활했다. 무명의 깜짝 스타에서 이제는 명실상부한 PBA 스타로 떠오른 그의 성장이 어디까지 도달할지 궁금하다. 그가 쏟은 노력의 배양분이 언제 성공의 과실로 나타날지 지켜보자.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