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녹음파일 공개 후 늪에 빠진 김명수 대법원장
삼권분립 훼손과 거짓말 논란으로 사법부 흔들
김종인 “법복을 입은 정치꾼”…탄핵 추진은 신중


김명수 대법원장과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정치권과 사법부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김 대법원장이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반려한 이유가 ‘국회의 탄핵 추진’ 때문인 것으로 확인된 것과 그에 따른 김 대법원장의 거짓말 논란까지 이어지면서 정치권은 물론 법조계의 공방이 커질 전망이다. 특히 녹음파일이 공개된 이날에는 국회가 본회의를 열고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재적의원 과반수(179명) 찬성으로 가결, 헌정 사상 처음으로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가 이루어져 파장이 더욱 커졌다.

임 부장판사는 변호인을 통해 김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과 녹취록을 이날 공개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5월 면담을 신청한 임 부장판사에게 "국회에서 탄핵 하자고 저렇게 설치는데 (사표를) 수리해 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하잖아"라고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의 음성 파일 이 공개되자 야당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등 삼권분립을 훼손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김 대법원장은 임 부장판사와의 면담 도중 ‘탄핵’이라는 단어를 최소 5번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전날 김 대법원장의 해명은 모두 ‘거짓 해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3일 김 대법원장은 “탄핵 문제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 임 부장판사 변호인측은 추가 입장문을 통해 "저희 측 해명이 있었음에도 언론에서는 진실 공방 차원에서 사실이 무엇인지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었다"면서 "더는 침묵을 지키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보더라도 도리가 아니고 사법부 미래 등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도 녹취파일을 공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돼 부득이 이를 공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변호인측은 이어 "2021년 2월 법관 정기인사를 앞둔 시점에서 임 부장판사는 2020년 12월 14일 다시 한번 종전에 제출한 사표를 수리해 법관직을 사임한 다른 법관들과 함께 사직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한 바도 있다"며 "그러나 임 부장판사와 마찬가지로 2월 말로 임기 30년이 만료되는 다른 법관은 사직 처리하면서도 임성근 부장판사는 2월 말 임기 만료로 퇴임하라는 것이 김 대법원장의 뜻이라는 연락만을 전달 받았다"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은 즉각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대법원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 녹음자료를 토대로 기억을 되짚어 보니, 지난해 5월 임 부장판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정기인사 시점이 아닌 중도에 사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녹음자료와 같은 내용을 말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약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했던 것”이라며 “기존에 이와 다르게 답변한 것에 대해 송구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후 퇴근길에서도 김 대법원장은 “임성근 부장판사와 실망을 드린 모든 분들께 깊은 사과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재차 사과했다. 그러면서 “오늘 국회에서 법관에 대한 탄핵 표결 절차가 이뤄졌다”면서 “안타까운 결과라고 생각하고 이 또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당장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임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 여부와 관련해 사법부 수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봤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또 하나의 ‘사법부 치욕의 날’이 나왔다”며 이번 사건을 평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거짓 해명’도 김 대법원장의 명예와 도덕성에 흠집을 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사법부 수장이 거짓말로 순간을 모면하려 했다”며 “법치국가에서 사법부 수장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실망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거짓 해명에 대한 사과도 부적절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법조인은 “대법원을 통해 공식 입장을 내놓고선 뒤늦게 ‘기억이 잘못 됐다’는 취지로 다시 해명했다”며 “‘기억이 잘못됐다’는 말은 법조계에서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정치권도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5일 국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거짓말 논란에 휩싸인 김명수 대법원장을 겨냥해 “이제 대법원장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이 상처 입은 국민께 속죄하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라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그는 또 “문재인 정부 들어 ‘무(無)법부 장관’에 이어 ‘무(無)법원장’까지 법과 정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기관이 무법천지로 변질해버린 현실이 정말 개탄스럽다”며 “대법원장이 스스로 거취를 결단하지 않을 경우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강력 경고한다”고 덧붙였다.

거짓 해명 논란으로 국면이 바뀐 가운데 여권의 법관 탄핵소추에 맞불을 놓은 형국이다. 하지만 당장 탄핵추진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여당이 절대과반을 차지하는 의석수 때문에 부결될 게 뻔하다는 이유로 탄핵안 발의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부결되면 대법원장한테 자리 유지의 명분만 주는 것이라서 탄핵안 발의는 현 시점에서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도 이날 오전 원내대책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탄핵을 적극적으로 막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김 대법원장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신중하게 하고 있다"면서 "탄핵에 필요한 서류나 이런 것은 다 준비해 놨다"고 말했다.

지도부의 신중한 입장과는 달리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추진에 나서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가 적지 않다. 조해진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권 측과 보조를 맞춰서 부당한 탄핵을 추구한 한 축으로 역할을 한 것"이라며 "물러나지 않으면 탄핵감"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탄핵거래 진상조사단장을 맡은도 김기현 의원은 이날 오전 대법원 앞에서 김 대법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노유선기자 yoursun@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