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대만 이어 EU와 일본도 지원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강대국들의 총성없는 전쟁터로 떠올랐다. 주요 국가의 정부는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반도체 패권경쟁’을 위한 총력체제 구축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힘을 쏟는 중이고,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쉼 없이 박차를 더하고 있다. 이밖에도 유럽연합(EU)과 일본 및 대만 등도 반도체에 국가적 미래의 명운을 건 모습이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의 대처는 다소 안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의 미래 비전을 위한 지원책은 커녕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 수준도 관련국과 비교하면 꼴찌 수준이다. 정부가 이제라도 사활을 걸고 기업과 함께 뛰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반도체 새판 짜려는 美, 굴기 잇는 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반도체, 배터리 등 4개 품목의 공급망에 대한 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반도체 칩을 들어올렸다.
“현재 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제조기반을 미국과 유럽에서도 확보하겠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온라인 브리핑을 열고 한 말이다. 삼성전자와 TSMC를 향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는 해석이 대다수다. 이날 인텔은 200억 달러(약 22조6000억 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신설, 이를 토대로 파운드리 사업을 키워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 반도체 기업 키옥시아(옛 도시바 메모리) 지분 인수를 계획 중이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이 전했다. 마이크론의 경우 글로벌 D램 공급 3위 기업이다. 키옥시아는 세계 낸드플래시 공급 2위 업체다. 지분 인수가 현실화할 시 반도체 업계는 판도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이처럼 공격적 행보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정부가 기업의 든든한 뒷배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에 빗댄 바 있다. 취임 약 한 달만인 지난 2월 반도체 등 미국 핵심 산업 분야에서 공급망이 취약한 부분을 찾아내 보완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서에 서명하면서다.
편자는 말굽에 붙이는 쇳조각이다. 못이 하나 없으면 편자가 망가져 말(馬)은 달릴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반도체 없이는 산업이 가동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당시 바이든 대통령 발언의 취지다. 이후에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에 500억 달러(약 56조4500억 원) 지원을 약속했고, 인텔과 마이크론 등 기업들은 업계 판도를 바꿀 플레이어로 전면에 나선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 시대에 안착한 오늘날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불린다. 특히 시스템반도체의 경우 앞으로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이 활성화될수록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 미국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이른바 ‘반도체 굴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정확한 반도체 지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업계는 천문학적 수준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패권전쟁이 꼭 미래 산업 등 돈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은 디지털 기술의 핵심인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주요한 한 축으로 인식하고 있다. 오는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는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을 초청해 최근의 반도체 수급불균형 문제를 논의한다. 이 회의는 사실상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한 성격이 짙다.
‘국가 주도’ 뒤쳐진 한국
지원금은 커녕 세금 핸디캡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국가 주도의 반도체 지원은 EU와 일본 및 대만 등 세계 각국에서도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컨대 EU는 당장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에 500억 유로(약 67조 원)의 투자 계획을 세운 상태다. 일본의 경우 경제산업성 주도로 반도체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별도기구를 설립해 운영하기로 했다.
특히 대만 정부의 의지가 눈에 띈다. TSMC 외 아직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낮은 자국 기업들을 제2, 제3의 TSMC로 육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난달 25일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인 PSMC가 2780억 대만달러를 투입하기로 한 신축공장 착공식에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참석해 첫 삽을 뜨는 등 정부가 반도체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다.
이렇듯 각국 정부가 반도체를 둘러싸고 긴박하게 움직이는 반면 우리 정부의 대응 수준은 비교적 한가해 보인다. 반도체 산업이 국내 총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국가 기간산업이지만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책을 선보이지는 않고 있다. 미국이 백악관 주재로 국가 안보와 경제 담당 보좌관들까지 참석시키는 반도체 수급대응 긴급회의를 열고 글로벌 기업을 소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달 4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반도체 및 자동차 업계 임직원 10여 명이 관련 대책을 위해 모였다. 이 회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실상급이 주재한 회의였다. 물론 산자부등 관계부처가 국내 차량용반도체의 자립화를 지원하기로는 했으나 반도체 산업 전체에 대한 지원책은 아니었다.
반도체 기업 한 관계자는 “위기는 늘 있었지만 최근의 상황은 무게감이 다르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전에는 중국의 추격이 거셌으나, 현재는 미국의 압력이 뒤따른다”며 “이 차이가 무척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과 중국은 국가 원수가 먼저 나서 반도체를 일으키려는데, 우리는 차량용반도체 등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관계부처가 나선다”고 꼬집었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볼멘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우리 정부의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규모는 세계 꼴찌 수준이다. 2014년~2018년 21개의 주요 글로벌 반도체기업 중 매출 대비 정부지원금 비중을 살핀 결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0.8%, 0.6%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 대비 정부지원금 비중은 마이크론 3.8%, 퀄컴 3%, 인텔이 2.2%에 달했다. 또 중국의 SMIC는 매출 대비 6.6%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았고, 화홍(5%), 칭화유니그룹(4%)도 비중이 컸다. 삼성전자의 강력한 라이벌인 대만 TSMC 역시 매출액 대비 정부지원금 규모가 3%에 달한다.
오히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핸디캡을 쥔 채 달리고 있다. 세금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의 투자 규모에서 최대 40%를 세금에서 깎아준다. EU는 투자의 20∼40%를 보조금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법인세(명목세율 25%)에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시설투자세액공제는 3% 수준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정부도 기업만큼 위기감을 갖고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위해 대대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중국 등 주요국들이 반도체 산업 ‘굴기’를 위한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을 놓치는 순간 ‘반도체 강국’이라는 타이틀 역시 빼앗길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온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미국은 1987년 반도체 제조기술 연구조합 ‘세마테크’를 출범, 정부가 인텔 등과 함께 투자한 덕분에 퀄컴이 탄생했고, 대만도 1973년 설립한 ‘산업기술연구원’(ITRI)을 통한 지원으로 TSMC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며 “반도체 산업이 기업을 넘어 국가 간 경쟁에 직면한 만큼, 정부와 기업은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