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슈롱 장 아비에가 1798년에 완성한 유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가 오이디푸스의 무릎에 기대 잠들어 있다. 클리블랜드 아트 뮤지엄 소장.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테바이 3부작’을 쓴 소포클레스에게는 순진한 독자가 미처 보지 못했을 일면이 있다. ‘작가이며 고전 문헌학자’인 배철현이 설명했듯이,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논쟁에 이력이 난 책상물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을 아는 군인이었고, 저마다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시인 소포클레스만 해도 사모스 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페리클레스와 함께 뽑힌 아테네의 아홉 장수 중 하나다. 이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배철현이 보기에 ‘안티고네(Antigone)’라는 이름은 모순이다. 그는 2018년 『한경닷컴』에 기고한 글에서 “‘anti’는 ‘~을 대항하여’라는 의미이고 ‘gone’는 ‘자궁, 출산’이다. 번역하자면, ‘어머니가 상징하는 사회관습에 대항하여’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런저런 글에서 안티고네의 이름을 ‘거슬러 걷는 자’라고 소개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내용과 맥락, 안티고네의 죽음을 염두에 둔 주장이니 근거를 추궁하거나 정확한 어의를 다툴 필요는 없겠다.

법률가인 임준형은 「안티고네와 저항의 법사상」에서 배철현을 인용해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요약한다. “인간론에 있어서는 ‘인간은 무엇인가?’,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 등이며, 정치철학적o법철학적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권력이 개인의 인권보다 중요한가?’ ‘개인과 국가 간의 정치적 상황에서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양심과 행복을 파괴하는 비이성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구조는 무엇인가?’ 등이다.” 그는 법철학적 질문, 즉 자연법과 실정법의 대립의 문제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크레온은 극단적인 법실증주의자다. “국가의 명령이 옳거나 심지어 옳지 않을 때도 복종해야 한다.”라고 까지 주장한다. 여기 맞서는 안티고네는 개인의 양심을, 그리고 실정법을 초월하는 자연법을 상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안티고네를 자연법의 대표자로 평가했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안티고네를 국가법에 대항하는 자연법의 대변자로 평가하였다. 안티고네는 또한 거슬러 걷는 자로서 ‘저항하는 자들’의 상징이 된다. 흑인 민권운동가 넬슨 만델라는 안티고네를 일컬어 “우리의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안티고네는 시민 불복종 운동의 효시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불복종 행동의 요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안티고네의 불복종은 ‘자율성’과 ‘수행성’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권력자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안티고네는 ‘시민불복종의 전형적 사례’일 뿐 아니라 ‘저항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다. 한편 여성주의 학자들은 ‘최초의 시민 불복종자’였던 안티고네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안티고네의 투쟁을 ‘가부장주의 질서에 맞선 여성의 투쟁’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안티고네는 ‘가부장적 지배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인물’(퍼트리셔 밀스, 『헤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해석』), ‘남성 중심적 사유에 도전하는 인물’(뤼스 이리가레, 『성적 차이의 윤리』)이 된다. 『안티고네의 주장』을 쓴 주디스 버틀러는 주목할 만하다. 정일권에 따르면 그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안티고네를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제안하면서 대안적인 친족형태를 제시하고자 한다. (중략) 동성애 금기를 파계한 안티고네는 젠더유토피아주의적인 대안적 친족관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일권은 논문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성혁명의 상징인가?」에서 버틀러가 “비극을 필요로 했던 당시 사회정치적 메커니즘(희생양 메커니즘)의 코드를 읽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안티고네」는 결코 급진적 페미니즘과 젠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스 비극은 혁명과 전복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리스 폴리스의 번영과 안정에 기여하는 ‘정치적 호국문학’이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과 마찬가지로 카타르시스를 위한 작품일 뿐 혁명과 전복을 선동하지는 않는다.

정일권은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의 저자 최혜영을 인용해 말한다. 그리스 비극의 배경이 되는 나라는 아테네의 대척점에 선 폴리스였고, 비극 속의 주체적인 여성은 ‘여성이 남성 역할을 대신하는 나라=망조가 든 나라’임을 강조하는 극작술의 결과다. 소포클레스는 테바이를 안티고네 같은 여자가 남자같이 용감하고 크레온 같은 남자가 여자같이 비겁한 사회, 시체 매장이라는 신들의 불문율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 명예로운 행동이 짓밟히는 사회, 왕실의 혈통이 끊긴 사회,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로 그려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결합과 경쟁으로 설명했다. 아폴론적 요소는 질서, 개성화, 이성, 예술의 힘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는 혼돈, 비이성과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힘이다.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존재의 불합리성에 대면하여 절대적 기준이나 판단이 없는 상황을 겪는다. 이 운명의 순간에 대해 인간은 개인의 의지를 포기하여 회피를 택하거나 고집스런 행동을 통해 불합리성을 극복하는 행위를 한다. 「안티고네」의 인물들은 후자를 택한 예다.(우승정)

잔혹한 투쟁과 파괴가 지배하는 인간의 삶이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니체는 “파괴적 투쟁의 행동이 아니라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안티고네」의 아곤(Agon: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법정 논쟁)은 크레온도 안티고네도 승리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우승정은 니체의 관점에서 「안티고네」의 아곤과 결말을 이해한다. 단일한 법과 윤리로 삶을 재단할 수 없다. 인간 사회는 하나의 가치로 지배하는 최강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강자를 허용하면 국가의 생명근거가 위험해진다. 법과 통치에 관한 의식도 경쟁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대체 신들의 어떤 법을 내가 어겼나요? 불운한 내가 여전히 신들을 바라봐야만 하나요? 동맹자들 중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요? 경건하게 행동하고서 불경죄를 얻었으니 말예요. 하지만 이것이 신들에게 좋게 보인다면, 나는 고통당하며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겠지요. 하지만 저들이 잘못했다면, 저들이 내게 부당하게 저지른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안티고네의 마지막 연설)

허진석 시인o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weeklyhk@hankooki.com